“오직 전진이 있을 뿐”
요즘 새로 도입한 신형 장갑차는 측면에 굴곡이 져 있다. 이는 파도와 부딪쳤을 때 선체 요동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김중령은 “구형 장갑차는 정비소요가 자주 발생해 점차 신형으로 교체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인터뷰 | 해병대 1사단장 김종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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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사단 장병들은 사단장 김종영 소장의 방침에 따라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한 시간 동안 체력강화훈련을 한다. 말이 훈련이지 실제론 자율적 운동시간이다. 대다수 장병은 이 시간에 구보를 하거나 공을 찬다. 김소장도 예외는 아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달린다. 해사26기인 김소장은 1972년 3월 소위로 임관한 후 연평부대장, 교육훈련단장, 사령부 부사령관 등을 거쳐 지난해 1월 1사단장에 취임했다.
-현대전은 전자전 미사일전 등 첨단무기에 의한 전쟁 양상을 띠고 있다. 상륙작전이 여전히 유효한가.
“매번 전쟁이 끝날 때마다 상륙작전이 필요한 것인지 논란이 일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상륙부대 규모를 줄이곤 했는데, 인천상륙작전이나 걸프전 때 드러났듯 상륙작전은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위력적이다. 교착된 전선을 뚫는 일, 측·후방 침투, 기습공격 등에서 해병대의 진가가 발휘된다.”
-상륙사단으로서 특수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교육훈련이 다른 부대와 많이 다를 것 같다.
“냉전종식이후 테러 등 초국가적 위협이 새롭게 등장한 안보환경을 고려할 때, 사단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막중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최고도의 전투전문요원을 양성하는 것이다.
해병대의 기본 임무인 상륙전은 바다와 육지, 하늘이라는 3차원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고도의 전술과 죽음을 무릅쓰는 용맹성, 강인한 체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공수훈련 유격훈련 IBS훈련 수색훈련 등 고난도의 혹독한 훈련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일반인들이 해병대를 특수부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해병대의 주임무가 상륙전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훈련은 이러한 상륙작전의 연장선에서 실시하고 있다.
또한 ‘해병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신념에서 지속적인 정신교육을 통해 작지만 강한 군대, 전투에 임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정예부대 육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또 21세기 다목적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교육훈련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교육훈련 외 평시 임무엔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 사단의 평시 임무는 포항공항, 항만, 포항제철, 월성 원자력발전소 등 국가 주요시설이 산재한 지역을 적의 침투로부터 방호하는 것이다. 또한 국민의 군으로서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해복구나 산불진화, 농촌일손돕기뿐만 아니라 환경보존활동, 무료순회진료, 불우시설돕기 등 국민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대민지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위해 지역 민·관군 협조체제로 울산 문수경기장에서 생화학 테러에 대비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미국의 대테러전쟁 의료지원단에 경비병력을 파견해 한국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군 유일의 해병대 상륙사단 지휘관으로서 지휘철학이 남다를 것 같다.
“앞으로 군은 저비용 고효율의 군대가 돼야 한다. 해병대는 이 개념에 가장 적합한 군대다. 전시에는 상륙작전으로 적의 도발의지를 일격에 꺾는 전략작전 임무를 수행하고, 평시에는 정부 전복기도, 내란, 테러, 영토분쟁 등과 같은 저강도 분쟁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다목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이러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기체계 지원도 따라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전사 양성이 중요한 과제다. 따라서 정예부대 육성을 부대 목표로 정해 장병들에게 극한상황을 경험할 수 있는 강한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장병들도 고된 훈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잘 따라주고 있으며 오히려 강한 해병대의 일원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간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강한 전투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여권신장에 힘입어 해병대에도 여성장교가 탄생했다. 걱정스러운 점은 없나.
“처음에 걱정을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켜보니 의외로 잘해나가고 있다. 정신력이 매우 강하다. 7명 중 4명이 보병 병과인데, 공수훈련을 받은 후 ‘고공낙하훈련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경쟁심 유발 등 긍정적 측면이 많다. 병영생활에서도 오히려 남자 장병들이 불편해하지 여성장교들은 개의치 않는다. 숙소를 구분하지 말라고 요구할 정도다. 부대 차원에서 화장실이나 BOQ(독신장교숙소), 휴게실 사용 등을 배려하고 있다.”
-일선 소대장을 맡기엔 무리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아주 다부지다. 체형에 따른 근본적인 체력 차이가 있을 뿐 임무수행 능력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해병대캠프를 열었을 때 여성장교에게 구대장을 맡겼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신세대 장병들의 체력이나 정신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에도 ‘요즘 애들 왜 이러나’ 하는 얘기가 있었다. 청소년 문제는 어느 시대나 다 똑같다. 내가 보기엔 자립심이 강하고 임무도 잘 수행하는 것 같다. 다만 개인적 성향이 과거보다 두드러진 것만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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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대대와 더불어 1사단에서 손꼽히는 수색대대는 해병대가 자랑하는 최고의 특수부대다. 해병훈련 하면 수색훈련을 떠올릴 정도다. 수색대 훈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IBS(7인승 고무보트) 훈련. 일명 상륙기습훈련으로 불린다. 105㎏에 이르는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에서 구보하는 모습은 일반인에게도 매우 친숙한 장면이다.
훈련장교인 이경복 대위가 신호를 하자 7명이 한 조를 이뤄 고무보트에 올라탔다. 야간 기습침투훈련이다. 가운데 1명, 양옆에 3명씩 나눠 앉아 힘차게 노를 젓는다. 가운데 앉은 사람이 조장이다. 보트가 파도를 타고 넘실거렸다.이들은 복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방수가 되는 얼룩무늬 복장에 얼굴도 얼룩무늬로 분장했다. 상의엔 공기부력장치가 부착돼 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방수용 장화를 신었다. 보트를 타는 동안 K1 소총은 등 뒤로 둘러멘다. 상륙한 이후엔 보트를 감추고 옷도 일반 전투복으로 갈아입는다.
조장인 허남일 하사에게 몇 가지 물어봤다. 시커멓게 얼룩진 얼굴에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밤에 보면 사람 눈인지 짐승 눈인지 구분이 안될 듯싶다. 옷 재질이 좋아 겨울철에도 물에 들어가는 것이 견딜 만하다고 했다. 체온이 유지되고 완전방수가 된다고 한다. 가장 힘든 훈련은 머리에 보트를 이고 뛰는 훈련이다.그가 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2000년 9월. 입대를 후회한 적 없냐는 질문엔, 예상은 했지만, 씩 웃으며 “후회한 적 없다”고 말했다. 분장 탓인지 웃을 때 드러난 이빨이 달빛이다.
수색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10주간의 특수훈련을 받아야 한다. 고무보트, 스쿠버, 전투수영, 인명구조, 폭파 등 다양한 훈련을 거친다. 탈락률은 10% 안팎. 이렇게 해서 수색요원이 된 뒤에는 이번엔 정예요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공수훈련, 동계 설한지 훈련, 고공낙하훈련 등을 받는다. 수색대대장 여승주 중령에 따르면 ‘제대로 된 수색요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1년 정도 꾸준히 훈련받아야 한다. 얼마 전에도 고공낙하훈련을 자원해 받고 왔다는 여중령의 눈빛엔 살기가 번뜩인다. 몸집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고공낙하훈련은 통상 5000∼1만피트 상공에서 실시한다. 1피트가 30.54㎝이므로 1만피트라면 약 3000m, 즉 백두산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사내는 해병대 수색대의 임무를 이렇게 설명했다.
“육군 특수부대의 수색대 기능에 상륙수색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보면 된다. 주임무는 수로 접안 이상 유무를 살피고 상륙군이 침투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해안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또한 해상 및 공중 침투요원을 지원하고 중요 표적은 직접 파괴하기도 한다.”
훈련중 사고 가능성을 묻자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며 “각종 안전대책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고위험이 따르는 고공낙하훈련을 계속 받는 이유에 대해 “숙지훈련을 하지 않으면 기술이 퇴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강한 군이기에 선택”
해병대 표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표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해병 현역·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엔 ‘불가능은 없다’는 해병대 정신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 바로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다.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에 대한 자부심과 타군과의 배타성을 강조하는 이 표어는 해병대를 지원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처럼 그간 강인한 사내들의 세계로 인식돼 온 해병대에 최근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금녀의 영역이던 각군 사관학교에 여자 생도들이 입학한 것을 계기로 해병대에도 여성 장교가 탄생한 것이다.지난해 해군은 20명의 여성장교를 배출했다. 일반 대학 학사 이상 출신인 이들은 필기시험을 거쳐 지난해 3월 해군사관후보생 96차로 입교했다. 남자들과 함께 1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7월1일 소위로 임관했다. 20명 중 해병간부후보생은 7명. 해간(해병 간부) 기수로는 87기다. 7명 중 4명은 보병에, 나머지는 헌병, 통신, 보급 병과에 각각 1명씩 배치됐다.이 중 1사단에 근무하는 조윤정 소위를 만나봤다. 헌병 병과인 조소위는 교통 소대장을 맡고 있다. 사단 영문 보초를 서는 헌병들이 그녀의 부하다. 올해 27세. 모자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얼른 보아 여느 여성과 다르지 않다. 홍조 띤 얼굴과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외모로 해병대 여성장교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소위는 해병대 입대 동기에 대해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육군은 너무 많이 뽑아 싫었다. 기왕이면 소수정예군에 들어가고 싶었다. 해병대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다. 가장 강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가 맘에 들었다.”조소위와 같은 기간에 같은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임관한 남성해병장교는 170명이다. 어떻게 배겨냈을까, 하는 의문은 그녀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답변 앞에 맥없이 풀려버렸다.“육체적 고통은 참을 만했다. 그 순간만 지나면 되기 때문이다. 정작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식사시간에 노래를 틀어줄 때는 맘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여자라고 훈련에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체력이 우리보다 못한 남자들도 있었다. 구보에서도 절대 안 뒤졌다. 악기(氣)로 버텼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조소위는 장교 임관 후 후반기교육을 육군에 가서 받았다. 그때 육군 관계자들로부터 “눈이 반짝반짝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조소위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이다.
남자들과 함께 병영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여자들은 괜찮은데 남자들이 오히려 더 불편한 듯싶다. 사단에 온 지 얼마 안돼 체력측정훈련을 할 때였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몸이 옆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 양팔로 무릎을 꽉 감싸안아야 한다. 그런데 사병들이 남자 장교의 무릎은 잘 잡아주면서도 내가 할 때는 쑥스러워서인지 겨우 발목만 잡았다.”
장기근무를 원한다는 조소위는 해병훈련을 받은 후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남한테 의지하는 태도가 사라지고 바깥사회에 나가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60㎜박격포 소대에 근무하는 임종원(24) 하사도 1사단이 내세우는 화제의 인물. 임하사는 얼마 전 병역기피소동을 일으켜 지탄을 받은 가수 유승준씨와 비교되는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군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미국에 7년 동안 거주했다는 그는 워싱턴주립대 3학년 재학중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귀국했다. 현재 연세대에 편입학한 상태. 그가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조소위와 비슷하다. “가장 세다고 해서”다.
“한국에서 남자 구실 하려면 군에 갔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무조건 군대를 가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다. 외조부는 직업군인으로 20년 동안 복무했고 아버지는 나처럼 해병대를 지원했으나 평발이 문제가 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2000년 7월 입대한 임하사는 훈련소 시절 훈련관들의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고생 꽤나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영어만 사용하다보니 국어에 어두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말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부대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소규모의 특수부대로 출발한 해병대는 창설된 지 1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에서 전사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귀신 잡는 해병대’니 ‘무적해병’이니 하는 애칭은 모두 한국전 당시에 얻은 것이다.
최초의 승전은 진동리전투. 1950년 8월 미 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데 목표는 진주 탈환이었다. 경남 마산 진동리 부근의 수리봉 서북산 등 주요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전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 장병들은 눈부신 전과를 올림으로써 해병시대의 개막을 알렸다.통영지구작전도 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인민군은 기수를 남해안으로 돌렸다. 거제도를 점령한 인민군 7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진해·마산항을 봉쇄할 목적으로 통영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해병대는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적을 격퇴하고 통영 지구를 방어했다. 진동리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의 잇따른 전과로 해병대는 전군 최초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미국 뉴욕타임스의 여기자 마거랏 히킨즈는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찬사를 썼다. 이것은 뒷날 한국 해병대의 대표적인 애칭으로 자리잡았다.
해병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마도 1950년 9월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낙동강전선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맥아더 사령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주력부대는 미 해병대 1사단. 여기에 한국 해병대가 가세했다.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올리는 영예를 누렸다. 세계전사에서도 꼽히는 인천상륙작전 참가는 한국 해병대에 상당한 자부심을 안겨줬다.
신화를 남긴 해병대
1951년 6월에 벌어진 도솔산지구전투도 기억할 만하다. 1차 전투의 주인공은 미 해병대 5연대였다. 미 해병대는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는 도솔산 지구의 고지들을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 미군 대신 나선 한국 해병대 1연대는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적을 격멸하고 24개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치하하기 위해 국방부장관 및 미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해병대 1연대를 방문해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전달했는데, 그후 ‘무적해병’은 해병대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구호로 널리 사용하게 됐다.김일성고지전투는 해병대의 임전무퇴 정신을 국내외에 과시한 전투다. 도솔산전투에서 ‘무적해병’의 용맹을 떨친 해병대는 중동부전선으로 재출동해 만대리분지(일명 펀치볼) 북단 능선 일대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는 인민군과 대치했다. 약 1600명의 인민군 1사단 3연대는 이중삼중의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완강히 저항했다.당시 아군의 병력은 훨씬 열세였다. 이에 해병대 지휘부는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이름 붙여 장병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밀고 밀리는 4일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결국 해병대의 손에 떨어졌다.
양도전투는 작전의 승리였다. 양도는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앞바다에 있는 3개의 섬(길주양도, 명천양도, 강후의도)을 일컫는다. 섬과 육지 사이의 거리는 4㎞가 채 안된다. 인민군은 처음엔 양도 대안(섬 건너편 해안)에 1개 중대를 배치했다가 이후 총사령부 직속의 63보병연대를 배치함으로써 병력을 강화했다. 1952년 2월20일 해병대 독립43중대는 인민군의 맹렬한 포격을 무릅쓰고 공격을 시작했다. 열세한 전투력이었지만 매복과 기습작전을 펼쳐 적 주력을 유인해 하루 만에 격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일부 인민군은 범선을 이용해 도주했는데 이 역시 해병대에 의해 해상에서 괴멸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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