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돌고 도는 일상의 반복이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과 달리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늘 낮과 밤을 반복하며 원을 그린다. 루틴(Routine). ‘반복 작업’을 일컫는 이 단어는 삶을 한마디로 압축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아무리 아픈 상처라고 해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흉터로 남고, 그 흉터는 점차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일상이 반복적인 나선형을 그리며 흘러가는 사이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잊어간다.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마침내 ‘정지’된 1953년 7월 27일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대연평도의 여름은 평온했다. 6년 전 이곳을 휩쓸었던 포화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섬은 이제 막 안정을 되찾았다. 주민들도 저마다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전협정 63주년을 앞두고 찾은 해병대 연평부대 장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루틴한 하루’ 속에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장병들의 치열한 싸움이 숨겨져 있었다.
전투 피로도 높아…휴식·수면시간에 신경
대연평도 서쪽에 위치한 구리동소초의 저녁은 평온했다. 이제 막 임무를 끝낸 장병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소초원들과 생활관을 함께 사용하는 수색대대 장병들이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야간경계 작전을 앞둔 소초원들이 준비를 하는 사이 생활관 앞에서 쉬고 있던 박창익 일병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보통 무엇을 하나요?” 기자의 질문에 박 일병은 이렇게 답했다.
“생활관 아래 풋살장에서 축구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전우들과 협동심도 키울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전우들끼리 자주 어울립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 즐겁기 때문입니다.”
늘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되는 연평부대는 전투 피로도가 높기로 소문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피곤한 임무를 수행하는 소초원들을 위해 소초장은 어떤 배려를 하고 있을까? 권순영(중위) 소초장에게 물었다.
“임무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두 해병대로서, 최전방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극복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해줄 수 있는 것이 한정돼 있지만 최대한 휴식, 특히 수면시간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3~5㎏ 탄약 지고 비탈진 산길 따라 야간작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야간작전을 위해 완전무장한 소초원들이 길을 나섰다. 3~5㎏에 달하는 탄약을 짊어진 장병들은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을 따라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운동 부족 탓일까?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며 겨우 따라가는 기자와 달리 장병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이 굳건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바닷새의 울음소리만이 순찰로를 감돌았다.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긴 길을 걷고 있을까?
“사실 생각할 틈이 많지는 않습니다. 끊임 없이 경계를 하고 수상한 점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을 내 손으로 지키고 있다는 긍지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문상석 일병의 말이다.
문 일병의 말처럼 구리동소초원들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걸은 뒤 나온 ○○초소에서 밤바다를 지키고 있던 박태훈 일병은 “너무 조용해서 지겨울 것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며 “내일도 똑같은 장소를 지키겠지만 늘 마음은 새롭다”며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지키는 섬이라면 편히 몸을 누일 수 있지 않을까? 동행을 마친 뒤 돌아온 숙소에서 잠을 청하기 전 다시 소초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튿날 아침 구리동소초 인근 해수욕장 앞으로 굉음이 들려왔다. 전차중대의 조종훈련 때문이었다. 평온한 시골길은 금세 먼지로 뒤덮였다. 전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 할머니에게 “시끄럽지 않으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한 모습 아닌가요? 우리는 최전방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죠.”
전차는 적의 도발로 위기에 처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히 현장에 투입돼야 하는 필수 전력이다. 그 때문에 중대는 어느 해안이든 15분 안에 도달해 적을 응징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중대가 도로 여건, 시간에 상관없이 조종훈련에 몰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대가 운용하는 전차는 1960년대 도입된 M48 모델이다. 최전방을 지키기엔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종환(대위) 중대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무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매일 닦고 조이며 능력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임무 수행에 지장은 전혀 없습니다.”
전차와 함께 섬을 지키는 또 하나의 주요 전력인 자주포를 운용하는 포7중대도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중대가 운용하고 있는 K9 자주포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으로 2010년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에도 그 성능을 입증했다.
중대의 일상은 ‘훈련’으로 압축된다. 거의 모든 일과 시간을 정확한 사격을 위한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포격도발 당시 적의 122㎜ 방사포가 떨어져 파인 웅덩이를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포상에는 아직도 포격도발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을 많이 하시지만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제가 흘리는 땀방울은 오직 승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진다면 이번엔 더 강한 해병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김민규 일병의 말이다.
일과 후 휴식 중에도 긴장감 가득
일과를 마친 장병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초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바다 너머 북한의 석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대연평도 북단 긴작시소초를 지키는 김수현 일병은 매서운 눈빛으로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온한 바다 저편으로는 고깃배 두 척만이 조용히 어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일병은 이 어선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중국 어선이 불법조업을 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몇 달 전에는 170여 척이 모여든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 확실히 어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일병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반복되는 경계와 훈련…긴장의 끈 놓지 않는다
구리동소초에서 시작된 연평부대원들의 일상 취재는 돌고 도는 여정 끝에 긴작시소초에서 마무리됐다. 현장에서 만난 장병들은 매일 반복되는 경계와 훈련 속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적막한 섬, 외로운 고지를 지키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연평부대원들은 해병대란 긍지로 가득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눈 장병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단어. 바로 ‘자부심’이었다. 포7중대 생활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은 반복을 자부심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연평부대원들의 기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그 문장은 바로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 반드시 승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