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은 전투함을 가져야 진정한 해군이다. 전투 수단을 갖지 못한 군대를 어찌 군대라 하겠는가.
건국 초기 해군의 가장 큰 염원이 전투함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미국에 출장가서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 701)을 인수해 오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1949년 10월 여의도 공항에서 뉴욕으로 날아가 임무를 수행했다. 갔다 와서 또 702·703·704함 인수단에 참여했다.당시 해군에는 36척의 함정이 있었다. 미국이 무장해제시킨 일본 해군 소해정(JMS)과 미국 해군이 사용하던 소해정(YMS)이 주력이었다.
나머지는 잡역선과 증기선, 상륙용 주정이어서 함정이라 할 수도 없는 배들이었다. 기뢰 제거를 목적으로 건조된 소해정은 작기도 하지만 설계상 함포를 장착할 수 없다.초대 해군총참모장이 된 손원일 제독은 몹시 전투함을 갖고 싶어 했다. 해군과 관계되는 사람만 만나면 입버릇처럼 전투함 타령을 했다.
그러나 소꿉장난 같은 당시의 국가재정 형편으로는 전투함 구매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우리의 조선시설과 기술 수준으로는 자체 건조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자연히 미국에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손제독은 미 군사고문단과 미 대사관 요원을 만날 때마다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에 보유했던 작은 배들도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전투함 확보위한 모금운동 펼쳐
노력이 결실을 보는 듯했다. 49년 초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한국 해군에 약간의 함정과 무기를 제공한다는 결정이 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뒤에 알고 보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무드 때문에 미국은 ‘전투함은 외국에 팔지도 양도하지도 않는다’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오는 방법뿐이었다. 결론은 그렇지만 예산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당시에는 외화가 너무 귀해 정부도 그 정도의 달러를 구할 방법이 없는 시절이었다.“애드미럴 손. 전투함을 구할 묘안이 없을까?”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손제독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애드미럴’이란 제독이라는 뜻으로, 이대통령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손제독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말에 더욱 부담을 느끼던 손제독의 뇌리에 유성처럼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해방헌금(海防獻金) 운동이었다. 일제가 해군력 강화를 위해 범국민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군함을 건조한 일이 떠오른 것이다.
해군·부인회 앞장서 목표액 달성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우선 해군이 모범을 보여야 국민이 호응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49년 6월 1일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결성했다. 스스로 위원장이 돼 운영규정을 만들었다.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장은 10%, 하사관·수병은 5%씩 매달 봉급에서 떼어 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장교 월급이 얼마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생활급에도 턱없이 모자랐던 기억뿐이다. 그래도 불평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투함을 갖고 싶었다. 전투함 보유는 해군 장사병 모두의 하나같은 열망이었던 것이다.
여자들도 팔을 걷어붇었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구경만 할 수 없다면서 해군부인회가 나선 것이다. 손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가 이끄는 부인회에서는 각자 수예품·의류·식품 같은 현물을 모아 바자회를 열었다. 그런 행사가 끝나면 길거리에 나가 팔았다.
천막을 치고 밤새 재봉틀을 돌려 만든 작업복·장갑·머플러 같은 것을 군에 납품하기도 했다.그렇게 모인 돈이 1만5000달러였다. 4개월이 못 돼 목표액을 채운 것이다. 손제독은 그 돈을 가지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9월 중순의 일이다.
“각하, 해군에서 전함을 마련하려고 기금을 좀 모았습니다.”
손원일 총참모장이 전함구매 계획을 보고하면서 돈 보따리를 내놓자 이승만 대통령은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벌써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부 보조금이라면서 큰 봉투 하나를 주었다.“애드미럴 손이 미국에 가서 군함을 사 오도록 해.”참모총장이 직접 출장을 가라는 명령이었다. 그 순간 전함 인수단을 꾸릴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봉투 안에 든 돈 액수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참지 못하고 경무대 문을 나오면서 열어보았다. 4만5000달러나 됐다. 상상할 수 없는 큰돈에 가슴이 뛰었다. 이 돈이면 전함을 몇 척이나 살까, 그 생각뿐이었다.손제독은 모금으로 생긴 돈과 이대통령에게서 받은 돈을 합쳐 6만 달러를 정부에 헌납해 정부 예산으로 구매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야 관계부처 지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영철 대령에게 참모총장 직무대리 발령을 내고, 손제독은 전함구매를 위해 서울 여의도비행장으로 떠났다. 그 당시 여의도는 한강 둔치에 널찍하게 펼쳐진 땅콩 밭과 풀밭이었다. 그 한가운데 군과 같이 이용하던 비행장이 있었다. 1949년 10월 1일의 일이다.비행기는 미국 노스웨스트항공사 프로펠러기였다.
도쿄를 거쳐 알래스카 앵커리지와 미국 본토 미니어폴리스를 경유하는 긴 노정이었다.전함인수단원으로 뽑힌 나는 그 며칠 뒤 인수단 요원 15명과 함께 여의도공항을 떠났다. 모두가 난생 첫 경험이어서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처음 지녀 보는 달러도 신기했다. 여비로 지급받은 돈이 1인당 250달러로 기억된다.
라 구아르디아 공항에 도착해 어둠이 깃든 뉴욕 시가지로 들어가면서 받은 첫 충격은 네온사인이었다. 세상에 저런 불빛이 있을까 싶었다. 불꽃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부자나라지만 밤늦도록 저렇게 불꽃을 쏘아대면 돈이 얼마나 들까 싶기도 했다. 한국의 도시는 제한 송전, 농촌은 깜빡거리는 전등 아니면 호롱불 신세였다.
그렇게 화려한 광고간판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먼저 도착한 손제독이 주미 대사 장면 박사 지원을 받아 1만8000달러에 교섭 중인 배는 길이 52.9m 450톤급 PC(Patrol Chaser)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격퇴를 목적으로 건조된 이 구잠함(軀潛艦)은 전후 퇴역해 미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선체가 우리 손에 넘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인수단원들은 모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뉴저지 호보켄(Hoboken) 항으로 달려갔다. 부두에 인접한 조선소에 정박된 그 배는 오래 방치됐던 탓에 비바람에 녹슬고 퇴색해 있었다. 우리는 배 안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 하루 모든 일과가 페인트 작업과 정비작업이었다.
수리비가 따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수리공이고 정비공이었다.정비작업에 미 해군의 협조를 받을 일이 많아 그들과 접촉할 때마다 어색한 장면이 연출됐다. 우리 해군이 나이에 비해 계급이 높았던 것이다. 주인보다 손님들 위계가 높았으니 어찌 불편이 없겠는가. 신생국 주제에 계급장만 많이 달았다고 수군대는 것 같기도 했다.
총참모장 나이가 40세였으니 그들의 입장에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고육지책으로 내놓은 해결 방안이 우리 계급을 낮추는 것이었다. 48세였던 함장 박옥규 중령을 제외하고 모든 인수단원의 대외용 계급이 한 두 계급씩 강등됐다. 그런 임시조치로 나는 하루아침에 소령에서 중위로 두 계급이 낮아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진해를 미 해군 극동기지로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얻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트루먼 미 대통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이대통령은 미모의 여류 시인 모윤숙 여사를 활용하게 된다. “윤숙이, 이 문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시오. 아무에게도 알리면 안 돼요. 뉴욕에 있는 존 스태거 씨에게 꼭 전해야 해.”
군사원조 위해 모윤숙 여사 도움
1949년 8월 모시인을 경무대로 부른 이대통령은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며 거듭 당부했다고 한다. 같은 심부름을 정부 공직자에게 시켰다가 실패한 다음이었다. 공직자가 일본에 들러 하코네 온천장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먹다가 서류를 분실한 것이었다.모시인은 임무를 완수하고 유엔 한국대표단 일행과 합류했다.
이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널리 승인을 받으려면 막 출범한 유엔외교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병옥 박사를 유엔 한국대표단장으로 임명해 뉴욕에 파견했다. 함정구입 교섭도 도와주라는 명령과 함께.
인수단원으로 일하면서 나는 손원일 제독 부관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예산사정 때문에 참모총장이 전속부관을 대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모시인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한번은 손제독이 모시인과 함께 뉴욕 맨해튼에서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손제독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모시인은 손제독을 입에 담았다. 멋지고 인품 좋고, 영어도 참 잘한다고 했다.
나는 괜히 우쭐했지만 퍼뜩 ‘눈치 없이 거기 앉아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비켜 주려고 배로 돌아가 봐야겠다면서 술집을 나왔다.오랜 수리와 정비 끝에 배를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미국 해안경비대 제8부두로 옮겨진 배의 예식갑판에서 명명식 행사가 열렸다. 장면 대사, 유엔 한국대표단 요원, 재미교포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마스트에 게양된 태극기에 경례를 올릴 때는 모두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러다가 애국가 제창 순서에서는 모두 울었다. 국민의 성금으로 이역 땅에서 우리 군함 명명식을 갖는 벅찬 감회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49년 12월 26일 오전 10시였다.
배 이름은 ‘백두산함’으로 명명됐다. 번호명칭인 ‘701함’은 귀국 후 해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부여된 것이다. 이 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미 해양대학교 출신 화이트 헤드 소위를 기리기 위해 ‘엔슨 화이트 헤드’(Ensign White Head)호로 불려 왔다.
첫 군함 명명 감격 눈물 '펑펑'
한국에서도 같은 뜻의 백두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상서로운 일이었다. 이 배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라의 운명을 건진 대한해협 승전보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한국을 향해 뉴욕 항을 출항할 때는 내심 걱정이 됐다.
배를 정비하는 동안 이성호 중령(해군참모총장 역임)과 김동배 소령이 미 해양대학교에서 레이더 운용법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런 전함을 움직여 본 경험자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됐다. 박옥규 함장과 이건주 부장이 능숙하게 배를 몰아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갔다. 박함장은 훌륭한 갑종선장이었다. 진짜 바다 사나이였다.
일제 때 진해 고등해원양성소를 나온 그는 나와도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일본의 큰 선박 선장 경험을 가진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배를 몰고 왔을까 싶다.박함장에게는 귀여운 딸이 하나 있었다. 그가 제2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사윗감을 추천하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았다.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동기생 이종철 소령을 추천해 일이 성사돼 더 깊은 연을 맺게 됐다.
<국방일보 2007.11.3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