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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 해병대 창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여순 사건 당시 나의 작전 경과보고에서 비롯됐다. 육상에서 일어난 5-3.jpg 반란을 바다에서 뻔히 보고도 아무 손을 쓸 수 없었던 안타까움 때문에 나는 해군본부에 적극적으로 해병대 창설을 주장했었다.

보고를 받은 손원일 참모총장이 그것을 결심했고, 나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은 신현준·김성은 두 선배의 권유로 나도 인천상륙작전 직후 해병대로 전과했다. 그러니 해병대와 나는 필연적인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하필 그 순간에 내가 거기에 있게 됐으며, 어찌하여 해병대 창설 주역인 손원일·신현준·김성은 세 선배와 그런 운명적인 관계에 있었던가. 아무래도 ‘운명’이라는 말밖에는 그 우연을 설명할 길이 없다.

여순사건 계기 해병대 창설 주장

잠시 앞의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반란이 일어난 1949년 10월 19일 여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제주 남방 해역 맥아더라인 경비 임무를 마치고 여수항에 입항해 늦은 저녁식사 중 반란사실을 알게 된 내용은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반란군에 붙잡혀 여수 북항 부두파출소에 갇혀 있던 나를 구출해 준 반란군 하사 덕분에 무사히 302정으로 돌아갔고, 그 덕분에 해군본부에 반란사건 발생을 최초로 보고하게 된 사정도 앞에서 언급했다. 그 뒤 여수항을 장악한 나는 폭도들의 해상탈출과 반란군 지원세력의 상륙을 봉쇄하는 임무를 홀로 힘겹게 수행했다.

나의 보고로 사태의 긴박성을 인식한 신생 한국 육군은 즉시 광주에 주둔 중이던 2개 부대(제2연대·제5여단)를 통합해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작전에 나섰다. 해군에서도 22일 JMS-302·305, YMS-505·516정으로 임시 정대를 편성해 이상규 소령을 정대사령관에 임명했다. 육군의 작전을 지원해 반란을 속히 진압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천군만마의 지원을 얻게 됐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임시정대는 오지 않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조차 없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해군본부는 27일 임시정대 사령관을 신현준 중령으로 교체했다. 통제부 참모장으로 있다가 여수로 달려온 신사령관과의 만남, 그것이 나와 해병대와의 두 번째 인연이었다.

신사령관은 정대를 인솔해 여수에 오자마자 육군 진압부대에 쫓겨 전마선을 타고 해상으로 탈출하던 반란군들의 퇴로를 봉쇄했다. 소해정에 장착된 대전차포를 발사해 해안 탈출로를 차단하는 위력도 보여 줬다.

그러나 부두와 육상에서 준동하는 반란군을 보고도 상륙전을 결행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우리는 발을 굴러야 했다. 대 전차용 37㎜ 포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해군에 육상 전투훈련을 받은 병력이 있었다면 반란은 더 쉽게 진압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반란 진압에 상륙부대 필요 보고

그것은 6개월 전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군은 그때도 직접 적과 맞싸우지 못했다. 반도들의 해상탈출을 봉쇄하고, 병력·군수품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는 해군 상륙부대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해안을 끼고 있는 도시에서 반란이나 전투가 일어날 경우에는 바다에서 상륙군을 투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우리 해군에도 적임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들을 모아서 해병대를 조직함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순사건 진압 직후 현지에서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작전경위를 보고하면서 나는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이렇게 보고했다. 손제독은 보고를 듣는 동안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동석했던 해군본부 간부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 보고를 받고 결심을 굳힌 손원일 참모총장은 내친김에 그 문제를 밀고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5-3CAPINZOH.jpg 해병대를 갖고 싶은 오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는데 국가 중대사에서 필요성이 제기됐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중국 상하이시대부터 미국 해병대의 엄한 군율과 탁월한 전투력을 보아 온 손제독은 해군 창설 직후부터 해병대 창설도 구상해 왔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예산 사정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연스레 필요성이 제기됐으니 절호의 찬스라고 본 것이다.

해군에 해병대 창설 방안 연구 지시

손제독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임시 정대사령관으로 동원했던 신현준 중령에게 해군에 해병대를 창설하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여순사건 작전 경과를 보고하면서 내가 건의한 내용을 토대로 해병대 창설이 급하다고 주장했다.

“해병대라면 해군의 육전대 말씀입니까?”“네, 유황도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미국 해병대를 말하는 겁니다.”“그거 좋은 생각이외다. 그런데 대통령각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이장관의 찬성을 얻은 손제독은 며칠 후 장관을 모시고 경무대에 들어갔다. 뜻밖으로 이승만 대통령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좋은 생각’이라는 말까지 보탰다.해병대 창설 방안 연구에 힘을 얻게 된 신중령은 법률사항 검토에 들어갔다. 우선 국군조직법에 해병대 창설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해병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복잡한 문제였다.

상륙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로 할 것인지, 해군시설 경비를 주 임무로 하는 부대로 규정할 것인지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오랜 논의 끝에 두 가지 임무를 겸하는 성격으로 규정해 창설 안이 마련됐다. 그런데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은 한마디로 결재서류를 물리쳤다.

육군이 있으면 됐지 지상전투를 하는 해병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이대통령의 구두 결재를 믿고 손제독은 이미 신중령을 대령으로 진급시킨 뒤 해병대사령관으로 발령을 내놓았다. 그런데 국방부장관을 대신해 육군과 해군 업무를 통괄하는 국방부 참모총장이 결재를 거부했으니 큰일이었다.

문제는 뜻밖으로 쉽게 풀렸다. 채총장의 해군 담당 참모로 근무하던 김성삼 대령의 기지로 해결된 것이다. 뒤에 육군참모총장이 된 채장군은 기골이 장대하고 몸집이 비대한 장수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점심식사 후에는 꼭 낮잠을 즐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 틈을 타 김대령은 같은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갔다.

김성삼 대령 기지로 쉽게 문제 해결

채총장은 귀찮다는 듯이 두고 가라고 했다. 그래도 김대령은 일반 결재서류 속에 끼워 넣어 들고 서 있었다. 마지못한 채총장은 졸린 눈빛으로 “이리 가져 와”하면서 보지도 않고 사인해 버렸다.그래서 채총장은 해병대 창설을 모르고 있었다. 1949년 3월 어느 날 주요 부대장 회의에 참석한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을 보고 채총장이 “귀관은 누군가”하고 물었다.

해병대사령관이라는 대답에 채총장은 “해병대사령관이라는 부대가 어디에 속한 부대냐”고 또 물었다.“며칠 전 총장님께서 결재하신 바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새로 창설되는 바로 그 해병대 말씀입니다.”해군 참모 김대령이 이렇게 대답하자 채총장은 화를 버럭 냈다.“이 사람, 새로 부대를 창설하는 중요서류를 왜 그렇게 결재를 받나!”

 

‘해병대는 하나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이 있다. 신현준 초대 해병대사령관이 혼자서 애쓴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원 한 사람을5-3CAJSMU1Q.jpg 늘리기 위해 한 사람을 몇 번씩 찾아다닌 초기의 삼고초려 일화를 들어보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2월 1일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신대령에게 해병대 창설을 위해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원을 확보하는 일부터 본부와 막사 건물, 교육훈련 시설과 장비, 보급품과 운영예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로 상태였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함께 일할 간부를 모으는 일이었다. 신사령관이 처음 낙점한 사람은 훗날 국방부장관이 된 김성은 중령이었다. 해군 준사관·하사관 교육대 교관시절부터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같이 일하자” 김중령에 삼고초려

처음 사무실로 찾아가 “같이 일하자”는 권유에 김중령은 가볍게 거절했다. 체제가 잡혀 가는 해군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사령관 계급이 대령인 해병대에 가 봐야 앞날이 뻔하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신사령관은 부인과 함께 두 번째로 김중령을 찾아갔다.“사령관님, 공관으로 저를 부르실 일이지 이렇게 직접 오시면….”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김중령에게 신사령관은 “당신이 꼭 필요하니 같이 일하자”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노”였다.신사령관은 세 번째로 부인을 데리고 김중령을 찾아가 똑같은 말로 통사정했다. 연장자이고 해병대사령관이 된 사람에게 세 번이나 간청을 받았다. 더 이상 거절한다면 사나이 의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공명도 아닌 사람을 세 번씩이나 찾아오게 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능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사령관님을 돕겠습니다.”이렇게 해서 해병대원은 두 사람이 됐다. 신사령관이 세 번째로 끌어들인 사람은 해군사관학교 교관 출신인 김동하 소령, 네 번째는 해군 인천기지에서 같이 근무한 고길훈 대위였다.

핵심 간부진을 확보한 신사령관은 해군본부에 창설요원 차출을 요청했다. 일본 해병대라 할 수 있는 일본 해군 육전대 근무 경험자 안창관 소위 등 31명이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발령났다. “해군 신병 13기생 가운데 필요한 사람을 선발해 해병대로 편입시키라”는 손원일 참모총장 지시에 따라 김성은 참모장은 체격이 좋고 용감하게 생긴 300명을 뽑아 해병 신병 제1기로 삼았다.

신병 300명… 49년 4월15일 창설

뒤이어 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 하사관 15명을 포함한 교관요원 40명이 확보됐다. 장비도 들어왔다.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 소총과 대검이었다. 창고에 오래 방치된 탓에 녹슬고 부식이 심했지만 그나마도 모자라 전 대원에게 지급할 수 없었다. 본부 건물은 부산 용두산 위에 친 천막·막사는 진해 덕산비행장 퀀셋 건물이었다.

그런대로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신사령관은 해병대 간부 인사를 발표했다.사령관 대령 신현준, 참모장 중령 김성은, 작전참모 소령 김동하, 군수참모 대위 이병희, 정보참모 대위 김용국, 헌병대장 중위 정광호, 제1중대장 대위 고길훈, 제2중대장 대위 김재주.

부족하고 미진한대로 군대의 진용이 갖춰졌다. 사령관 임명으로부터 2개월이 지난 49년 4월 15일 해병대는 역사적인 창설식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5-3CA00VVHV.jpg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식은 조촐했지만 깊은 의미가 있었다.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6·25전쟁 때 해병대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이나 15년 뒤 베트남전에 해병청룡부대를 파견해 국위를 드날리게 된 미래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신현준 사령관은 해병대 창설식에서 훈시를 통해 ‘일치단결’ ‘고난을 이겨내는 군대’ ‘최강부대’ ‘교육훈련 정진’ 이런 말을 많이 했다. 그것은 오늘날 해병대의 존재 목적과 사명으로 굳어졌다. 그날부터 실증을 통해 그 정신을 세상에 알렸다.

정부수립 행사 해병대도 참가 ‘뿌듯’

창설식이 있은 지 4개월 만인 8월 초, 손원일 참모총장은 정부수립 1주년 기념일 겸 광복 4주년 8·15 기념행사에 해병대도 참가토록 지시했다. 육·해·공군과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게 된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해병대의 존재를 서울시민에게 처음 선보이는 행사를 갖게 된 해병대원들 모두의 가슴은 설??다.

교육훈련 틈틈이 행사 연습이 시작됐다. 어느 군대보다 규율 있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은 장·사병 모두 같았다. 서울에 가본다는 것도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정복을 빨아 다리고, 구두에 광을 내고, 단정하게 이발을 하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끝에 서울 도심지를 시가행진하면서 대원들은 한껏 가슴을 폈다.

연도의 시민들 호응도 뜨거운 것 같았다.그렇게 서울을 다녀온 지 열흘 만에 해병대에는 신병 1기생 400명으로 구성된 특별부대가 편성됐다. 김성은 중령이 부대장으로 임명돼 이 부대는 뒤에 ‘김성은 부대’라는 별칭으로 통하게 됐다. 이 부대에 처음으로 한 지역의 치안유지와 경비 임무가 주어졌다. 진주지역을 작전지역으로 떠맡은 것이다.

육군 2개 대대의 월북사건에 책임지고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이 물러나고 그 후임이 된 채병덕 장군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채총장이 하루는 손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진주지역을 해병대가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말했다. 자신이 만든 부대에 임무가 부여되는 사실이 기뻤던 손제독은 즉시 신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단단히 일렀다.

“사령관, 지금 육군참모총장 전화를 받았는데, 우리 해병대가 창설되고 처음 맡은 작전임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진주에는 지리산 공비들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테니,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시오.”

김성은 부대가 진주에 주둔한 지 2개월 만인 10월 29일 부대는 지리산 공비들에게서 ‘시험’을 당하게 된다.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간 공비들이 그 사건 때문에 창설된 해병대를 건드린 것도 우연 치고는 운명적인 우연이었다.

김성은 부대, 지리산 출몰 공비 소탕

공비들은 10월 29일 밤 진주사범학교 강당을 기습함으로써 진주시 장악을 기도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성은 부대는 함양·산청 일대 지리산 산록지대에 출몰하는 공비들을 소탕하고 12월 26일 제주도로 옮겨 가게 된다.

공비들의 진주기습 사건 때 경찰의 상황파악 착오로 해병대가 반란군으로 몰린 해프닝이 있었다. 공비들과 김성은 부대 사이의 전투상황을 오판한 진주경찰서장이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내무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내무부의 통고를 받은 국방부가 하동에 주둔한 육군 1개 대대를 출동시키려는 순간 경찰의 오판 사실이 밝혀져 사태는 없었던 일이 됐다. 하마터면 국군끼리 맞서 싸우는 상황이 일어날 뻔했다. 잘못된 보고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5-3CANKJBMN.jpg 해병대 창설식 행사가 끝난 뒤 해병대원 전원은 완전군장 차림으로 천자봉 시루바위까지 기념행군을 했다. 고난을 이겨내는 군대의 모습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창설행사로부터 3주일 만인 5월 5일에는 국군조직법 해병대령이 공포됐다. 이로써 해병대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군의 일원이 됐다.

역사적인 해병대 창설행사가 끝난 뒤 해군·해병대 일각에서 가벼운 화제가 생겼다. 해병대 창설에 그렇게 열성을 기울였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창설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해병대사령관이 주연”

그것은 손제독의 깊은 생각 때문이었다. 창설 행사가 끝난 뒤 손제독에게 불려가 해군본부 정보감 임명통보를 받은 함명수 소령이 손제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대답은 간단했다. 해병대사령관에게 모든 영광과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해병대 일은 해병대에게 맡길 생각이야. 오늘은 누구보다 해병대사령관이 빛나야 하는 날이야.”손제독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령관과 해병대원 모두의 입장에 서서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사람이다. 그는 훗날 예산문제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병대를 편하게 해 줬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말의 일이다. 김성은 참모장이 새해 예산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손제독을 방문했다. 예산문제라는 말을 듣고 손제독은 “잘 왔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잘 들어 봐. 해병대는 아직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니 항상 존립을 염두에 둬야 하오. 될 수 있으면 예산을 적게 쓰는 게 존립에 이로워요. 예산을 많이 쓰면 틀림없이 해병대를 없애자는 말이 나올 거요. 생각해 보시오. 육군이나 해군·공군은 없애자는 말을 할 수가 없지만 해병대 때문에 몫이 줄어들면 그냥 두고 싶겠소?”

그러면서 손제독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은 모두 해군에 넘기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해군이 예산을 따서 해병대로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해병대는 작고 강한 군대, 예산을 적게 쓰는 군대여야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손제독의 생각은 6·25 직전 해병대 간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49년 12월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주둔해 있던 육군부대와 교대해 제주도로 이동한 해병대는 공비토벌 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장비 증강을 해군본부에 건의했다.

그때 함정 구입을 위해 미국에 출장 중이던 손제독은 김영철 총장대리에게서 전문으로 그 보고를 받았다. 해병대는 작고 강한 군대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존립이 위태롭다는 평소의 생각을 전문으로 답신했다.

손제독 '작고 강한 군대로' 강조

손제독의 뜻을 알아차린 김대령은 해병대 병력은 120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해병대사령부에 통보했다. 해병대 간부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너무 실망이 큰 나머지 단체로 전역신청서를 내는 집단행동을 하고 말았다. 사태가 엉뚱하게 흘러갔지만 그 다음다음 날 6·25 동란이 터져 집단항명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손제독은 군대사회에서 제일 먼저 ‘각하’ 호칭을 없앤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49년 8월 김성은 부대를 진주에 주둔시킬 때였다.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에게 전화로 진주이동을 지시하자 신사령관은 말끝마다 “알겠습니다.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각하”하고 응대했다.

말이 끝나자 손제독이 조용히 말했다.“앞으로 나에게 각하 호칭은 쓰지 않도록 하시오. 각하는 대통령 한 사람으로 족해.”그 뒤 해군·해병대에서는 장성들에 대한 각하 호칭이 사라졌다.


<국방일보 /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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