윞해병대가 창설 직후 주둔지를 이동한 것은 육군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육군에서는 병력교체와 보급품 운송 때마다 해군 지원을 받는 일이 번거롭다는 이유를 들어 해병대와 교체했다고 기록돼있다.
그것도 타당한 사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거기에 주민들과 의 불협화도 한 가지 이유가 됐지 않았을 까 싶다. 4·3사건 진압과 수습 과정에서 있었을 일들 때문에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 이동 목적에 한라산 공비토벌과 함께 ‘피폐된 제주도민들의 민심 수습과 치안 확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피폐한 민심 이란 무엇이고, 그 작은 섬에 치안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해병대가 제주도로 옮겨간다는 말이 나오자 “해병대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모양”이라고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주 시절 경찰의 잘못된 보고 때문에 반란군으로 몰릴 뻔했던 일과 연관시킨 추측이었을 것이다. 제주도로 가는 게 싫었던 사람들의불평일수도 있겠다.
제주도민들 가운데는 군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사태 진압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아닌가.
“해병대는 적에게는 사자같이무서운 군인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온순한 양과 같은 군인이돼야 한다.”
제주도로 이동한 뒤 신현준 사령관은 이런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공식대화나 훈화 또는 기념사 같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대민 접촉 때의 주의사항을 되풀이 강조했다. 주민들을 접할 때 ‘아버님’ ‘어머님’, 또는 ‘형님’ ‘누님’ ‘아저씨’ 같은 호칭을 사용하도록 지휘관들에게 지시한 사람도 신사령관이었다.
어떤 지휘관은 부대원들을 주민들 제사에까지 참석시켰다. 같은 날 많은 희생자가 난 마을에제사가 있을 때에는 지휘관이 부대원들을 데리고 마을에 가서 단체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마을 청소도 해 주고, 다리도 고쳐 주고, 허물어진 담도 쌓아주는 노력봉사도 했다. 처음에는 경계의 빛을 띠던 주민들도 진심으로 불행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려는 자세에 마음이 풀려 차츰 차츰 가슴을 열었다.
주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신사령관은 순회진료반까지 운용했다. 사령부 의 무대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병과 상처를 치료해 주고 약을 나눠 줬다.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제 발로 의무대를 찾아와 병을 상담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런 노력은 해병대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져 6·25 때 3000명이나 되는 제주도 청년학도들이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게 된다. 한결같이 두뇌가 우수하고 협동심이 강했던 제주도 장병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해병대의신화를 창조하는 데앞장섰다.
제주도 이동 당시 해병대원 수는 1100명정도였다. 그것도 그해 9월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2기 신병(해군14기) 450명을 포함한 수였다. 이런 사정에 3000명이라는 지원자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해병대와 제주도와의 특별한 관계는 이렇게출발했다.
신사령관은 2개 대대의 전투부대를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에 분산 주둔시켰다. 한림과 서귀포 성산에는 사령부 직할 정보대와 헌병 분견대를 배치했고, 사령부가 자리 잡은 제주읍에는 각 참모부서 요원들로 편성된 본부중대와 하사관교육대 및 근무중대를 주둔시켰다.
제주도 이동 직후인 1950년 1월 육군사관학교에 위탁교육을 갔던 31명의 간부후보생(해간1기)이 육사9기들과 동시에 교육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돼 돌아왔다. 그들이 사관교육대 교관요원과 소대장이 돼해병대는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제주도 이동 당시 한라산에 숨어든 공비는 수백 명으로 추산됐다.
밤이면 산록지대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히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신현준 사령관은 적극적인 작전을 폈다. 공비들이 숨어 있는 깊은 산속으로 토벌대를 투입시킨것이다.
산세가 험한 한라산 바위 능선 아래는 자연동굴이 많았다. 일제 때 일본군이 포 진지나 탄약고로 쓰기위해파 놓은 인공 동굴도 많아 공비들이 은신하기에 좋았다. 거기에 기상이변이 심하고, 눈·비가 오는 때에는 시야가 나빠 토벌작전에어려움이 컸다. 특히 초목이 무성한 여름철과 눈이 덮인 겨울에는 민첩하게 이동하기가 어려워 작전성과가 더 부진했다. 공비들은 시야가 탁 트이고 몸을 숨기기 좋은 곳에 초소를 만들어 놓고 토벌대 접근을 탐지했다. 무슨 신호방식을 썼는지, 어렵게 접근해 보면 온데간데없이자취가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까마귀 작전’이었다.
까마귀는 인조(人鳥)다. 먹을 것을 찾아 사람 사는 곳에 따라와 사는 새다. 까마귀가 많은 곳에는 공비 잠복처가 있었다. 까마귀를 찾으려면 인분 냄새를 따라가면 된다. 하늘을 보고 까마귀를 찾고, 땅을 보고 냄새를 추적하는 희한한 수색작전은 의외로 성공확률이높았다.
1950년 2월 하순의 일이다. 세오름 부근에서 수색활동을 하던 김익태 토벌대가 능선위를 낮게 나는 까마귀 떼를 발견했다. 김익태 분대장은 신속하게 까마귀 나는 곳으로 이동해 쌍안경으로 관찰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공비 세 명이 야생마를 도살하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해 공격하려고 살금살금 몸을 옮겼다.
그때 놀란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면서 날기 시작했다. 상황을 눈치챈 공비들도 같이 달아났다. 여러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졌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좁은 땅바닥에 말가죽과 살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공비 둘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한 명은 달아났다. 부근을 샅샅이 뒤져 조그만 동굴아지트를 발견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동굴 밖에는 야생마 한 마리가 노끈으로 턱이 묶이고 몸은 나무에 칭칭 매어져 있었다.
곧 도살될 말이었다. 한 분대원이 대검으로 끈을 풀어주자 말은 ‘히힝’하는 울음소리를 남기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보급투쟁’이 어려우면 공비들은 야생마를 잡아먹었다. 제주도에서는 먹이가 풍부한 봄부터 가을까지는 조랑말을 방목으로 키웠다. 그래서 한라산 숲속에는 야생마에 가까운 말들이 많았다. 그 말들도 주민들 재산이었다. 토벌대에는 야생마를 보호할 임무도 부여됐다.
야생마 몸에 DDT 가루를 뿌리면 독약을 친 줄 알고 잡아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토벌대원이 있었다. 그러나 야생 상태의 말을 붙잡을 방도가 없어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그런말을 공비들은 잘도 붙잡았다.
토벌대원들은 처녀공비 ‘연옥’이에 대한 아름다운 사연을 공유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 훈육관 시절 내가 조수로 데리고 있었던 진두태 상사 토벌대원들에게는 연옥이 공동의 ‘애인’이었다. 토벌활동 나가는 일을 그들은 “연옥이 보러간다”라고 말했다. 꿈속에서 연옥과 사랑을 나눴다는 대원들도 있었고, 연애편지를 써 공비들이 다닐 만한 길목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는 대원도 있었다. 연옥이는 4·3사건 때 공비들에게 부역한 아버지를 따라 입산했다는 사연만 알려졌을뿐 얼굴을 본 사람도, 대화를 나눠 본 사람도 없었다. 여자가 그리운 토벌대원 모두의 ‘상상 속의 연인’이었다.
진상사는 훗날 장교가 돼 영덕전투 때 빛나는 전공을 세운 해병혼의 상징이다. 청송박지산 전투 때 전사한 그는 전쟁영웅이 돼전쟁기념관으로 돌아왔다. 국방일보 / 정리=문창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