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사령부 해체의 비통함을 전 해병대원의 특수 요원화시킨 이동용사령관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된 73년 7월 포항사단장으로 임명된 이 장군은 사령부 해체의 비통함을 전 해병사단 특수요원화를 추진하기위해 각 연대별로 1개대대는 공수대대. 유격대대.기습특공 대대로 명명하여 강훈과 특수훈련에 매진했다. 사단내에 공수교육대를 발족시켜 라호원 대위를 발령, 부관 김인식 중위와 이장군 스스로 공수교육대에 입교 5주간 기본교육을 받은후 육군에서 지원한 C-123 수송기로 안강상공 1.300피트 고공에서 2일간 2회 연속으로 점프를 했고,
그후 비바 U-6A 정찰기로3회 영일비행장에서 점프하는 기록한소식을 미8군사령관 이 제네럴 리! 넘버원 이라며 칭찬이 자자 하였다 한다. 이때 해병대 자체에 공수마크. 유격대마크.기습특공대마크를 제작 각 훈련을마친 해병대장병들을 사단본부 연병장에서 이동용 사단장이 직접가슴에 달아주기도 했다.
사단 공수교육대장 라호원 해간 45기씨의 말에 따르면 안강 벌에서 고공 점프는 사단장 1일 1회 하게되 있는것을 이장군 께서는 1일 2회씩 점프기록을 세웠고 점프를 마친후 철모에 막걸리를 가득채워 벌컥 벌컥 마사던 모습을 잊을수 없다 고 한다.
포항 사단장 재임시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사단활주로 옆에 골프장을 개설하였던 이 장군은 충북 보은출신으로 청주상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던 이장군은 해병대를 동경한 나머지 1950년 1월 제주도 에서 해간 2기로 입대 50년 7월 임관함과 동시에 8월5일 모슬포에 입대한 해병 3기 신병 교육대 소대장 근무중 23중대 2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하셨다.
75년 중장으로진급 지휘권없는 해군 2참모차장으로 숨막히는 임기를마치고77년 8월 예편 하였으며 울산석유화학사장.수협중앙회장 역임하였던 이동용 장군은 충북개발 사장 재임중 1987년 6월 장남의 죽음과 관련된일로 한강에 투신한 이장군을 아는 해병인들에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출처] 특과장교 2기 정채호님의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