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강기천
2010.08.22 11:09

강기천 전 해병대사령관의 고향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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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천_thum.jpg

 

 

목포 공생원과의 인연

목포 공생원은 강기천 장군의 생애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곳 중의 하나다. 윤학자(尹鶴子)라는 일본인 여성(본명 다우치 지즈코)이 6·25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한국인 남편(윤치호 원장)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고아원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강장군은 언젠가 꼭 한번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포시청을 순시할 기회를 갖게 된 강장군은 공생원을 직접 방문, 윤학자 원장의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인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돕기로 결심을 했다.

 

강장군은 그 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목포 공생원의 윤원장에 대한 얘기를 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의장은 관계부처 장관과 협의하여 공생원 지원방안을 연구해보라는 지시를 직접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강장군은 우선 대한민국 훈장을 윤원장에게 수여할 계획을 세웠다. 윤원장의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공생원의 존재를 널리 알려 관심과 지원의 손길을 뻗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후로 강장군은 제과점에서 직접 구입한 초콜릿 등 원생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차에 듬뿍 싣고 수차례 공생원을 방문하곤 했다.

 

그리고 윤원장에 대한 훈장 내신서를 직접 작성하여 박의장의 내락을 미리 받아놓고 주무부처인 총무처에 제출했다. 강장군은 그로부터 2~3개월 후 박의장을 수행하여 영산강개발계획과 관련, 목포를 시찰하게 되었는데 윤원장을 대면시켜 금일봉을 전달하도록 했고, 그해 광복절 기념식 때는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게 했다. 당시 윤원장에게 수여된 훈장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에게는 처음이었고, 더구나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 일본 국적을 가진 민간인(여성)에게 수여된 전무후무한 훈장이었다.

 

이를 계기로 목포 공생원과 윤원장에 대한 화제소식이 매스컴을 타고 국내외에 널리 보도되었고 특히 일본정부와 국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후원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감정의 골이 깊이 패여 있던 한·일 양국의 이해증진에도 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 일본 정부에서는 남수포장(藍綬襃章)을 폐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윤원장에게 수여했는가 하면 그녀가 타계한 이듬해(1969년)는 일본 천황이 훈(勳) 오등보관장(五等寶冠章)을 추서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강장군의 인간적인 작은 보살핌이 한·일 양국의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고 죽음의 문턱에 선 한 외국인 여성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강기천_박정희.jpg
 ▲초등학교 은사였던 김한필 선생을 잘 모시도록 챙겼을 정도로 각별한 인연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이 현역시절 강기천 장군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스승 김한필 선생의 추억

강장군의 인간적인 면을 살펴 볼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강장군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한필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대접은 훗날 두고두고 영암사회에서 회자되곤 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 시절, 친구에게 부탁해 은사님을 서울로 초청한 강장군은 기성복 한 벌과 모자와 구두 등을 사드려 착용케 한 다음, 이튿날 박정희 의장에게 말하자 “요즘 젊은 사람들 스승을 알지 못하는데 강위원장 참 좋은 일을 했군”하면서 “모처럼 상경을 했으니 내일 국군의 날 행사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더란 것이다. 이에 강장군은 “그러잖아도 그렇게 해드릴 작정이었다”고 대답한 뒤, 그 날 저녁에는 몇몇 최고위원과 장관들이 초대된 음식점에 스승을 모시고 가 상석(上席)에 모셔놓고 극진한 예우를 하며 음식대접을 해드리고 상경 이틀째를 맞게 했다. 그리고 10월1일 국군의 날, 아침이 되자 김한필 선생을 모시고 행사가 거행되는 서울운동장의 로얄박스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박의장에게 소개하자 박의장은 다정한 말씨로 “김한필 선생이시죠. 법사위원장으로부터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 다음 “서울에 계시는 동안 편히 잘 쉬고 가시지요.”라고 했다. 상경 4일째에는 공군부대 에어쇼를 구경시켜드리고 그곳에서 또 박의장 내외분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다음날에는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체전 개막행사에 특별기동차 편으로 모셔갔는데, 함께 타고 가던 최고위원들과 장관들이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무척 놀랍고 부러워하더란 것이다.

 

강장군은 그날, 전주에 도착한 은사를 귀빈숙소에 모시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고, 그 다음 날 체전 개막행사가 끝나자 전남도지사가 제공해준 승용차를 타고 광주까지 내려가 도지사를 비롯 주요 기관장들과 회식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작별을 했다. 훗날, 김한필 선생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강장군과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그 제자 덕분에 큰 호강을 했다” “교사를 한 보람을 그때처럼 감격스럽게 느낀 적이 없었다”고 후일담을 털어놓곤 했는데, 강장군 역시 “그때의 일을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무렵,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장 근무시절에는 영암에서 찾아온 유지들(하남두 김준혁 천수봉씨 등)로부터 무기가 부족해서 치안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부에 건의, 소총과 실탄 상당량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훗날, 영암출신 장병들이 해군(병)에 몰려들었던 것도 강장군의 이 같은 세심한 배려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친구 김석문의 후원자로        

특히 고향에 대한 강장군의 유별난 사랑과 그동안 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의 영암중·고등학교와 영암여자중·고등학교가 있기까지는 그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1962년 영암농업고등학교가 경영난과 학생수 미달로 폐교되었지만, 이듬해 문교부를 통해 곧바로 복교 조치시키고 본관 6개 교실을 증축했는가 하면 이후에도 각종 자재와 중장비를 동원하여 2개 교실증축과 운동장 정지작업을 도와 후배들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장학기금으로 당시 3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영암중고등학교 기성회원들은 이를 기념해 1969년 강장군의 송덕비를 학교에 세우기도 했다.

 

강기천_가족.jpg
 강기천 장군 내외와 직계 4남매. 장남 승선씨(뒷줄 가운데)는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암여자중고등학교는 당시 김석문 설립자가 절친한 친구인 강장군을 부대까지 찾아와 돈이 없어 학교에도 못가는 후배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남대문시장에서 밀거래되고 있는 미제  군용천막 2동을 부인을 통해 사줬다. 이를 계기로 고등공민학교가 만들어졌고 나중에 중학교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김석문 설립자는 또 강장군에게 요청하여 여중학교 승격지원을 받아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는 여고의 신설인가를 문교부 당국자에게 부탁, 관철시켰다. 학교 운동장 정지작업에도 군장비를 투입하여 적극 지원에 나서는 등 영암여중·고와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학산서중·독천중·신북중 증축, 독천·종남·금정동초등학교 교실 증축용 군자재 지원, 각급 학교 예산지원에 앞장섰다. 지금의 구림중학교의 경우는 당초 군서고등공민학교로 출발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염원을 저버릴 수가 없어 공립중학교로 승격시키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특히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시절에는 영암군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해창다리를 놓아 준공식에 참석한 관내 기관장을 비롯한 당시 14만 군민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다른 곳에 들어설 삼호의 용당(목포) 비행장도 직접 영암으로 끌어와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엉망이었던 곳곳의 수리시설은 강장군의 손길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금정 남산지구 입석제와 영암읍 장수제는 강장군이 직접 조치하여 수많은 몽리민들이 혜택을 보았다. 신북·도포 등지의 저수지 보수, 도포·시종지역 전기가설, 영암읍내 상수도 설치 및 도로포장·하수구 정비, 영암전분공장 설치인가, 도갑사 입구 교량가설, 용당-목포간 연락선 증설, 영암향교 보수, 영암재향군인회관 건립 등도 강장군의 힘이 보태졌다. 1963년 한해로 식량이 귀할 때 구호양곡을 매월 1천석씩 도 배정량 외로 특별배정토록 하여 굶주리는 고향사람들이 없도록 했고, 사비를 들여 농기구를 영암군에 희사했는가 하면 영암초등학교 도서구입, 열무정 활쏘기 대회 우승기 기증, 영암4-H클럽 단기 기증 등 작은 일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1963년 영산강유역개발 계획수립을 위해 영산강하류 순시를 마친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 권한대행을 삼호면 엄포부락에 초치, 마을양어 자금을 현장에서 하사할 수 있도록 했고, 1967년 한해 때 삼호·학산지역을 ‘구호지구’로 선정될 수 있도록 전남지사와 협의, 식량을 배로 지급할 수 있게 했다.

 

비만 오면 차가 못다닐 정도로 도로가 불량했던 영암-강진(풀치제) 국도정비사업과 영암-독천간 도로정비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여 해결했다.

군예편 후 박대통령의 권유로 목포·무안·신안지구 공화당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에는 당초 군산에 설치키로 한 해군기지를 삼호 용당으로 유치했고 비포장도로로 엄청난 예산이 수반됐던 영암-독천간 도로를 국도로 승격시켜 확포장시켰던 장본인이다.

 

정계를 떠나 재야에 묻혀 살면서도 사비를 들여 영암초등학교 운동장의 스탠드 설치 지원과 군립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하고 영암문화건립 때도 거액을 희사하는 등 그의 고향사랑은 끝이 없다.<끝> 문배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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