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의 덕산 비행장에서는 해병대 창설식이 거행됐다. 해군에서 편입된 장교 26명과 하사관(현 부사관) 54명, 해군에 갓 들어와 해병대를 지원한 300명의 사병이 전부였다. 2개 대대로 출범한 해병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 총을 들고 있었고, 훈련도 일본군 철모를 쓰고 할 정도로 장비 등이 모두 열악했다<큰 사진>. 비행장 활주로를 연병장 삼아 3개월간 고된 훈련을 받았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병의 자부심은 여기에서 키워졌다.
해병대가 창설된 것은 48년 10월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함정 4척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했던 신현준(1915~2007·작은 사진) 해군 중령이 "상륙군이 없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지 못했다"고 보고하자,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이 상부에 건의해 창설됐다. 초대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된 신현준 중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해방되면서 광복군 제3지대 대대장에 임명됐고, 귀국 후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에 견습사관으로 입대했다. 신 사령관이 이끄는 해병대는 6·25전쟁 발발 뒤 7월에 장항·군산에서 북한군과 첫 격전을 벌였고 통영에서 첫 단독 상륙작전을 펴 1950년 8월 23일자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귀신을 잡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보도됐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칭이 이 전투에서 붙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고, 도솔산 지구 전투에서 승리해 '무적 해병'이란 칭호를 받았다.
신 사령관은 창설 후 휴전 직후까지 4년 6개월 재임하면서 해병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9년 해병 1기생인 신영철이 작사한 '나가자 해병대'를 군가로 지정했고, 1951년 8월 독수리·별·닻으로 구성된 해병대 마크를 제정했다.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명찰'과 황색 이름도 6·25전쟁 중에 만들어졌다.
신 사령관은 휴전 후인 1953년 10월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196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신 사령관의 후임으로 2대 김석범 소장(중장 예편), 3대 김대식 중장이 대를 이었고, 현재 유낙준 중장이 30대 사령관이다. 해병대사령관은 7대 강기천, 8대 정광호, 9대 이병문 사령관 등 3명만 대장이었다.
조선닷컴 [안준호 기자 libai@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