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해군사관학교 교과목은 지금의 이학사 과정에 비춰도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국어·영어·국사·대수·물리 같은 교양 공통과목에, 군사·통신·항해·기관·군법·지정학·해병학 같은 전문과목도 공통 필수과목이었다.
병과(항해)·기관과·통신과 등 3개 학과별로 이수과목이 각각 달랐으며, 여러 가지 스포츠를 통해 체력단련과 협동정신을 연마했다. 연극반·문학반·악기반까지 둬 정서교육에 신경을 썼으니 교육자로서의 손원일 제독의 면모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해군사관학교 교풍이 미 군정장관 청탁을 물리친 일화는 지금 회상해 봐도 통쾌하다. 정부와 다른 기관 단체들이 모두 그랬다면 한국은 지금쯤 존경받는 선진국이 돼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임관 후 모교에 근무할 때 겪은 일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워 여기에 인용한다.
美 청탁 거부한 해군 신화 이어져
1947년 11월 군정장관 러치 장군이 지병으로 임종하면서, 수하의 한국 청년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며칠 뒤 통위부(군정청 시대 국방부) 고문 테릴 프라이스 대령이 학교에 찾아와 김일병 교장에게 그 뜻을 전했다.“중도에 생도를 받을 수 없으니 내년에 다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김교장의 완곡한 거절에 머쓱했던 프라이스 대령은 며칠 뒤 다시 찾아와 같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김교장은 말없이 자신의 책상 위에 모자를 올려놓았다.“먼저 나를 해임하고 그 학생을 넣든지 아니면 내년에 입학시험을 쳐 들어오게 하든지 양자택일하기 바랍니다.”한동안 말이 없던 프라이스 대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국 해군사관학교가 이런 곳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이런 경위로 군정장관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해군사관학교 신화가 이루어졌다. 군정장관이란 45년 광복의 날부터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날까지 3년 동안 한국의 행정을 대행한 임시정부 수반이었다. 지금의 대통령에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른 권력자의 청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쾌거였다.
구축함 실습, 손제독 배려 덕분
우리가 재학 중 미 해군 구축함에서 실습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를 즉시 몸에 익히게 된 것도 손제독의 원려와 배려 덕분이었다. 우리는 46년 8월부터 미 해군 구축함에서 실습을 하게 됐다.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미 해군은 그때까지 한국 해역에 머무르면서 38선 이남 해역을 경비 중이었는데 손제독이 이 틈을 이용한 것이다. 미 해군으로서도 유능한 보조원과 통역요원의 승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부산항에서 조별로 배정된 구축함에 올랐을 때 일제히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가 신고 있던 일본군 군화 바닥에 박혀 있던 쇠못(징)이 문제였다. 날카로운 쇳소리의 출처가 우리의 군화라는 것을 알게 된 미군 장병들은 기겁을 했다. 갑판 바닥의 페인트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 공해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싯다운! 에브리 코리언 싯다운!”그들은 우리를 모두 앉히고 어디선가 펜치 같은 공구를 들고 나왔다. 당장 구두 징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신사라는 자부심으로 목에 힘이 들어가 있던 생도들이 갑판 바닥에 주저앉아 구두 징을 뽑아내느라 땀을 흘리던 기억은 다시 되살리기 싫은 악몽이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