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란이 한창인 1950년 9월 15일 당시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이미 맥아더는 일찍부터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전 후 이윽고 7월 2일 극동군 사령관 터너 죠이 중장으로 부터 해병대 1개 연대를 수륙양용작전에 대처 충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맥아더는 다음날 통합 참모본부로부터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받자마자 곧 인천작전 계획의 입안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미 제 24보병사단의 고전과 이의 증강의 필요상 이 야심적인 계획은 일단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에게서 다행이었던 것은 제 1해병대사단이 필요하다면 6주간 이내에 극동에 배치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그의 구상은 되살아난 것이다.
7월 15일에 작전참모본부로 맥아더는 계획을 올리면서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절대 불가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 본국의 군수뇌들은 육군참모총장 코린즈를 중심으로 이 작전에 반대하였다. 어떤 작전참모는 <인천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의 악조건을 갖고 있다.> 또한 어느 장교는 <우리들 기획부 대부분은 만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다면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까지 극언을 했다. 한국에 있던 제8군사령부도 증원은 부산교두보 부터 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8월 중순부터 셔먼 작전부장과 함께 도쿄에서 상의하려 날라온 코린즈에 대하여 도리어 맥아더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관철시켰다. 끝까지 반대한 셔먼도 마침내 <저자처럼 자신을 가지면야...>하고 인정했다.
통합참모본부는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에 조건부로 승인을 하였다. 맥아더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주도권을 적으로부터 빼앗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 한 가지 희망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엔군은 무기한 소모와 희생을 요구하는 승산 없는 전쟁에 말릴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9월 8일 통합참모본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재승인하고 대통령의 재가도 얻엇다. 작전을 위하여 맥아더는 일본에서 제 1해병사단과 육군 제 7사단을 갖고 제 10군단을 급히 편성한 것이다. 예정대로 9월 15일 제 8군이 낙동강연안을 따라 총반격에 나서면서 호응하여 제 10군단이 인천기습 상륙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원래 공군력이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는 곳에 배후의 보급로를 차단 당함으로써 이번에는 북한이 패주하게 된 것이다. 상륙작전 2주간 간만에 미군은 서울을 포함한 남한의 거의 전지역을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북한과 소련 정보당국이 맥아더의 상륙작전을 9월14일 암호해독과 첩보를 통해 하루 전에 간파하였으나, 위장으로 집중 폭격한 원산과 제 3의 지역으로만 감지하여 아무 대책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북한은 탱크와 공군의 야크기를 거의 다 잃어 육군에 이어 공군의 제공권도 상실하여 결과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결국, 동북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한반도를 연합군에게 넘겨주게 된것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전선에 배치된 적의 주력부대(당시 북한전투병 90%이상)의 퇴로를 차단하여 완전 괴멸시킨 작전으로 기록되었고, 맥아더는 한국사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었다.
7월 15일에 작전참모본부로 맥아더는 계획을 올리면서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절대 불가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 본국의 군수뇌들은 육군참모총장 코린즈를 중심으로 이 작전에 반대하였다. 어떤 작전참모는 <인천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의 악조건을 갖고 있다.> 또한 어느 장교는 <우리들 기획부 대부분은 만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다면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까지 극언을 했다. 한국에 있던 제8군사령부도 증원은 부산교두보 부터 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8월 중순부터 셔먼 작전부장과 함께 도쿄에서 상의하려 날라온 코린즈에 대하여 도리어 맥아더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관철시켰다. 끝까지 반대한 셔먼도 마침내 <저자처럼 자신을 가지면야...>하고 인정했다.
통합참모본부는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에 조건부로 승인을 하였다. 맥아더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주도권을 적으로부터 빼앗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 한 가지 희망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엔군은 무기한 소모와 희생을 요구하는 승산 없는 전쟁에 말릴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9월 8일 통합참모본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재승인하고 대통령의 재가도 얻엇다. 작전을 위하여 맥아더는 일본에서 제 1해병사단과 육군 제 7사단을 갖고 제 10군단을 급히 편성한 것이다. 예정대로 9월 15일 제 8군이 낙동강연안을 따라 총반격에 나서면서 호응하여 제 10군단이 인천기습 상륙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원래 공군력이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는 곳에 배후의 보급로를 차단 당함으로써 이번에는 북한이 패주하게 된 것이다. 상륙작전 2주간 간만에 미군은 서울을 포함한 남한의 거의 전지역을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북한과 소련 정보당국이 맥아더의 상륙작전을 9월14일 암호해독과 첩보를 통해 하루 전에 간파하였으나, 위장으로 집중 폭격한 원산과 제 3의 지역으로만 감지하여 아무 대책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북한은 탱크와 공군의 야크기를 거의 다 잃어 육군에 이어 공군의 제공권도 상실하여 결과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결국, 동북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한반도를 연합군에게 넘겨주게 된것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전선에 배치된 적의 주력부대(당시 북한전투병 90%이상)의 퇴로를 차단하여 완전 괴멸시킨 작전으로 기록되었고, 맥아더는 한국사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