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배속장교 양성
정부 수립 후 1948년 말경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고, 그들을 훈련시킬 지도교관 양성을 위해 전국 중·고·대학의 체육교사를 중심으로 단기간의 군사교육 실시 후, 소속 학교에 배속시켰는데 이것을 배속장교라고 한다. 여자배속장교는 1949년 6월 30일 중고·대학 교사 문일련(부산사범 교사) 등 32명을 여자배속장교로 입교시켜 1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실시 후, 이들을 예비역 소위로 임관시켰다. 교육내용은 제식훈련·독도법·화기학·각개전투·지휘통솔법 등이었으며, 제반 교육은 구서울사범대학교에서, 분·소대 전술은 장충공원에서, 실탄사격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시하였다.
임관 후 여자배속장교의 대부분 대원은 각 학교로 복귀하였으나, 여자훈련소가 설치되자 일부는 중앙학도훈련소 소속으로 잔류하였다. 1949년 9월 27일 학도호국단 폐지로 중앙학도훈련소는 해체됐으며,그 후 여자청년단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발발시 여자의용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구국의 일념으로 탄생된 여자의용군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자배속장교 훈련대장이었던 김현숙 예비역 중위는“국난을 당하여 여자라고 가만히 앉아서 남성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여자의용군모집을 이승만 대통령께 건의하여,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초500명 모집을 계획하였는데, 총 2천명의 많은 인원이 지원하였으며, 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쳐 중학교 이상 학력을 가진 자 500명을 최종 선발하였다. 이로서 1950년 9월 1일부로 육군 제2훈련소 예속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창설되었고, 1950년 9월 4일부로 입대식이 실시되었다. 이들은 화기학·분대 전투·독도법 등 보병으로서의 기초훈련을 받았고, 3주간의 맹훈련
을 거쳐 1950년 9월 26일 부산시 성남국민학교에서 500명 중 9명을 제외한 491명이 수료식을 가짐으로서 육군의 여자의용군 제1기가 배출되었다. 여자의용군은 정훈대·첩보대·전투부대·예술대 등에 편성되어 큰 활약을 펼쳤다. 1950년 10월 12일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해체되고, 육군본부 직할로 여자의용군 훈련소를 창설하여, 여자의용군 제2기 383명이 1950년 12월 27일 배출되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의 전세는 긴박해져 교육기간을 3주에서 17일간으로 단축하였다.
또한 1950년 8월 중순경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 작전을 시도하고 있을 때,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이 되기 위하여, 제주도에서 보병대대를 증편하였는데, 제4기 보병대대에 여자의용군 12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여학생과 교사양성소 학생이었으며, 현직 교사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남자 해병 제4기생과 입대식 후, 9월 1일 제주항에서 해군수송선을 타고 9월 2일 진해에 도착 후 신병 기초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통제부 여자특별중대로 편성되어 9월 20일까지 M1 소총과 칼빈소총을 휴대한 단독군장으로 제식교련·총검술·사격훈련·포복훈련 등 남자와 동일한 훈련을 받았고, 9월 20일 이후에는 해군 신병훈련소 특별분대에 편입되어 남자 교관에 의해 교육을 받고 10월 10일 40여일간의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원숙덕 등 장교 4명, 예비병 조장(상사) 2명 등 71명이 임명장을 받았다. 여자의용군들은 해군본부(부산)와 통제부(진해)에 배치되었으며, 간호사·홍보요원·예비 서무사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일부는 위문공연단(무용수)을 인솔하고 극장 섭외 등의 업무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14일 아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여 수복하였고, 1951년 6월 23일 소련 측에서 휴전을 제안하여 전면전은 일단 중지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놓이자, 전방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던 여군이 철수되고, 1951년 8월을 전후하여 많은 여자의용군이 제대하였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9월 6일 여군의 날은 1950년 여자의용군교육대의 탄생을 기리는 것이다.
여군으로의 전환과 활동
여군은 창설 당시 여자의용군으로 출발하였으므로 학도의용군과 비슷하게 병과 분류도 여의(겿義)였으나, 1951년 11월 15일 여자의용군훈련소가 해체된 후 2년간 여군의 모집이 중지되다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내에 여군과를 설치하여, 각 국감실 및 부대에 배속된 여군의 인사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여군(겿軍)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여군으로서 임무 수행이 가능한 분야를 개척하여 남자군인의 전투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대비책으로서 1953년 여군 기술하사관(현 병사) 모집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중단되었
던 여군 모집의 재개가 가능해졌으며, 속기·통신·타자·경리·일반행정 등 특과병으로서 각 분야에 입대하게 되었다. 특히, 타자기술 특기는 오로지 여군의 노력에 의해 획득한 분야로서, 공병우 박사가 처음 개발한 한글타자기를 활용하여, 군 행정의 신속·정확한 업무처리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며, 컴퓨터가 보편화되기까지 여군의 주특기로서 자리를 잡았다.
공군‘여자항공대’창설
공군 창군 이전인 1949년 2월15일 당시 육군항공(군)사령부 예하에‘여자항공교육대’가 발족하였다. 이 때 여학교 5·6학년 재학생중 학교장 추천에 이은 선발시험을 통해 최종 여자항공병 제1기생 15명이 이등병으로 입대하였다. 이들은 기본군사훈련과 통신·정비·기상·조종 과목 등에 관한 이론및 실습교육을 받았다.
‘여자항공교육대’창설과 양성교육에는 1949년 1일 10일 입대 당시 이미 40세의 중년 여성이었던 일본의 민간 비행학교 출신인 여류비행사 이정희 중위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녀는 여자항공교육대장으로 임명되어 후진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1949년 10월 1일부로 공군이 창설되자 여자항공교육대는‘여자항공대’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50년 2월과 4월에 걸쳐 학과시험을 통과한 39명을 2기생으로 선발하였다. 2개생들은 1기생들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으나, 교육 개시 4개월만에 6·25전쟁을 맞아 더 이상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발발 직후 여자항공대장 이정희 대위(1949. 8. 15 대위진급)가 실종됨에 따라 구심점을 잃은 여자항공대는 재경부대가 후퇴하면서 같은 해 6월 해체하게 되었다. 이후 일부 여군(20여 명)은 비행단에 복귀하여 기상·통신분야 등에서 근무하다가, 1954년 10월 김경오 대위의 전역으로 여군 운영이 중단되었다. 공군 조종사로서 하늘을 날고자 했던 그들의 꿈은 50년이 지난뒤 공군사관학교 첫 여자생도가 임관(제 49기)한 2001년 이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간호장교 탄생
1948년 5월 1일 제1육군병원(영등포구 대방동 구 공군본부 위치) 창설 후 군병원에 필요한 전문 간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 8군 간호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면허 소지한 간호사를 간호장교로 임관시키는 간호장교후보생제도를 도입하였다. 150명이 지원하여 신체검사와 면접을 거쳐 1948년 8월 26일 김감은 등 31명을 소위로 입대시켰다. 이들 31명 중 12명은 임관 즉시 제1육군병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19명은 미 제382후송병원에서 3개월의 군사훈련 및 실무교육 이수 후 제2, 3병원에 각각 배치되었다. 이것은 당시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한국 첫 여군의 탄생이자 여성장교의 임관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