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48년 군수·특수부대 잇따라 창설 / 국방일보 2008.03.12
건군기 육군은 조선경비대 시기에 창설한 특별부대인 보급부대와 육군 개편 이후에 설치한 특수부대인 유격부대를 운용했다. 보급부대는 1946년 7월 1일 제1연대 보급중대(영등포 소재)를 근간으로 통위부 직할로 창설됐다. 채병덕 참령이 부대장이었다. 부대는 47년 4월 1일 병기부대사령부라 하고 예하에 병기·자동차·창고 및 보급중대를 뒀다.
48년 1월 1일에는 통위부 후방부대사령부라 개칭하고, 제1병기·제1병참·제1공병대대를 증·창설했다. 그해 후방부대사령부는 통위부 잠정 후방사령부로, 다시 잠정 특별부대사령부로 명칭을 바꿨고 제1병기단·제1병참단·제1의무단과 제51통신대대·제1공병대대 및 통신학교·수색단을 증편하며 보급지원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춰 갔다.
49년 1월 7일 백홍석 대령이 지휘할 무렵 주둔지를 인천(부평)의 미군 ASCOM(군수지원사령부)으로 옮기면서 특별부대사령부를 해체하고, 예하 부대를 육본 직할로 예속시켰다. 명칭·조직 개편이 잦았음은 당시 부대 확장의 어려운 과정을 잘 말해준다.육군에는 북한의 인민유격대에 대비한 특수부대도 있었다.
이범석 국방부장관의 제안에 의해 설치된 육군수색학교·호림부대·보국대대가 그것이다. 육군수색학교는 육군총사령부의 직할로 수색에서 창설됐다. 대원은 주로 서북 출신 장병으로 구성됐다. 48년 11월 6일에는 독립대대로 편성해 지리산지구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49년 5월 수원으로 이동, 부대를 정비한 후 6월 4일 옹진지구에 투입됐다.
6월 20일 독립 제1대대라 개칭할 때 수도경비사령부로 편입됐다. 통칭 ‘38선부대’라 했다. 옹진에서 철수한 뒤 다시 수원으로 이동해 제5사단으로 예속 전환돼 제주도에서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진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조재미·박승일·김종순 중령이 차례로 부대장을 맡았다. 50년 6월 15일 김종순 중령이 보임시 제3사단으로 예속 변경됐다.
호림부대 역시 서북 출신의 민간인으로 구성됐다. 부대는 49년 2월 25일 영등포에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창설됐으며, 육본 정보국 특무과장인 한왕용 소령이 지휘했다. 창설 후 대원들은 대구의 제18연대 주둔지로 이동해 부대 정비를 한 다음 그해 5월 2일 유격전술 교육차 서울의 육군수색학교에 입교했다.
그들은 육군수색학교에서 약 5개월간의 유격훈련을 받고 2개 대대(제5대대 180명·제6대대 136명)로 편성, 설악산지구에서 활동했다. 적지 않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38선 경비여단에 포위돼 타격을 입어 영등포학원으로 재편됐다가 호국군으로, 일부는 현역으로 전환됐다.
보국대대(제803독립대대)는 북한의 귀순 장병(장교 52명·사병 약 500명)으로 구성됐다. 부대는 보병 제3사단에 배속돼 영남지역 공비토벌작전과 지역주민에 대한 선무심리전을 수행했다. 예비역 안병식 소령이 대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했으나, 6·25전쟁으로 그해 7월 10일 해체돼 제1군단에 편입됐다.
그 밖에 특수부대로 48년 12월 31일 각 여단에 1개 유격대대가 창설돼 공비소탕작전을 위해 잠정 편성됐으나 이듬해 바로 해체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