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무기 개발비화]세계 최강의 K-9 자주포(Ⅷ)  신인호 국방일보 기자

 

1991년 10월 해군사관학교 순항훈련분대는 한국해군 사상 처음으로 인도양, 홍해,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서 유럽대륙에 발을 디뎠다. 그 유럽 첫 기항지가 바로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들어설 때에는 한국해군을 환영하는 예포가 울려 퍼졌었다. 폭 너른 해협의 한 가운데 함정을 투묘한 채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선착장에 상륙했을 때 해사생도들은 귀를 의심했다.
터키인 누군가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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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도시에서 택시기사를 하는 그 터키인은 TV를 통해 한국해군이 방문한다는 뉴스를 듣고 무려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왔다고 했다. 그는 6・25전쟁 참전용사였다. 살아 있는 동안 한국 해군함정의 터키 방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을 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터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이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이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1999년. 터키인들은 한국에 우정과 보은의 정을 피부로 느꼈다.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터키의 한 도시를 강타했을 때 먼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따스한 위문의 손길이 전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독자개발한 155mm 자주포 K-9이 터키에 좋은 조건으로 수출되자 터키인들은 이 또한 그들에 대한 한국의 보답으로 여겼다.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중해변의 교통・전략 요충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14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600여 년 동안 중동지역과 동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예들로서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언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산악지형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라는 점 등이 우리와 유사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병여단 병력 5,068명(연인원 14,936명)이 참전하여 3,216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는 등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를 흘린 진정한 혈맹이다. 또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관련된 것은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준 우리의 진정한 우방국이기도 하다.

이 터키에 K-9자주포체계가 우리나라 방위산업 사상 단일 품목으로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의 규모로 수출 계약이 체결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국방부, 육군, 국방과학연구소, 삼성테크윈이 공동으로 이룩한 또 하나의 작품이자 드라마였다. 무기체계의 수출이란 성능과 가격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등 여러 면에서 고려되는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에 K-9 연구개발진으로서는 초기에 사실 큰 기대를 갖지 못했던 것 이 사실이다.

혈맹 터키에 K-9 수출작전 시작되다

K-9의 대(對)터키 수출이 최초 제기된 것은 국내 전력화 생산계약이 체결된 직후인 1999년 3월 19일 터키수도 앙카라에서 개최된 제3차 ‘한국-터키 방산협력 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당시 문일섭 국방부 획득실장에 의해서였다.

회의에서 터키 측에 기술이전 공동생산을 제의한 문실장은 곧바로 주(駐)터키 국방무관 고현수(高賢秀,준장 예편)대령에게 4월 중 K-9에 대한 대(對)터키 설명회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삼성테크윈 측에도 설명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현수대령은 우리 군 장교로는 최초로 1985년 터키지휘참모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하면서 터키의 군사학과 언어, 그리고 문화를 익히며 터키와는 두터운 휴먼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수학한 동기생들이 대령에서 소장에 이르는 고급 장교층을 형성하고 있고 교관들은 대부분 터키군의 영향력 있는 장군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터키 지원반장으로 활동했고, 한국을 방문하는 터키 주요 인사들의 통역을 도맡아 담당하는 등 터키의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능력을 발휘했었다. 문 실장의 지시를 받은 고 대령은 이후 K-9의 ‘대터키 수출작전’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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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되려면 거기에는 꼭 적합한 인재가 있기 마련인데 바로 그 인재가 고현수대령”이라는 국방과학연구소 안충호 책임연구원의 말처럼 그는 K-9자주포의 터키 수출작전에 있어서 중요한 교두보(橋頭堡)였던 것이다.

고 대령에게 떨어진 첫 번째 과제 K-9설명회였다. 이는 정상적인 절차와 경로로 개최하려면 3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일이다. 이미 외국방산업체들의 설명회가 6월까지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 대령은 지휘참모대학 동기생들과 교관 등 인맥의 도움을 받아 설명회가 4월 중에 개최되도록 주선했다.

4월 29일, 삼성테크윈의 오창석 전무를 주축으로 한 해외영업팀이 터키 국방부를 방문해 K9 자주포 설명회를 가졌다. 이때 참석한 터키 측 관계자 20여 명 중 샬리 방산차관보를 비롯한 기술국장, 대외협력국장 등 고위급의 참석은 이례적이었고, 이들의 K-9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그러나 후속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터키 지상군사령부 주관으로 독일과 PzH2000자주포의 기술이전 공동생산을 추진 중이었으므로 우리의 협력사업 추진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터키는 1999년 8월 17일 이즈미트 지역에 지진에 의한 국가적인 참사를 당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김동신(金東信 전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은 이때(8월 27일) 터키를 방문, 외국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지진현장을 찾았다. 김 총장은 참혹한 현장에서 우리 군 장병들이 정성껏 모은 성금에 개인여비까지 보태 터키 지상군사령관(우리 군의 육군참모총장 격) 아틸라 아테쉬대장에게 전달했다.

이 모습은 터키 언론매체를 통해 터키 전역에 생방송으로 보도됐다. ‘혈맹’ 한국의 우정이 터키 국민들의 심금을 적셨다. 김 총장은 아테쉬 대장과 가진 공식 회담에서 우리 K-9자주포의 우수성과 함께 터키와의 공동생산 가능성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국방부도 지진사태와 관련하여 터키를 돕기로 결정하고 군과 방산업체에서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당시 국방부는 K-9의 해외 수출하기 위해 장관 이하 관계자들이 군사외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터키의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고현수 대령은 1999년 10월 4일 아테쉬 대장을 면담했다. 무관으로서 지상군사령관을 면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터라 지상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쾌살 장군의 도움을 받았다.

아테쉬 대장은 주(駐) 독일무관을 4년간 역임하고 동기생 중 1차 진급을 계속해온 존재로서 독일대부라고 일컬어질 만큼 터키에서도 알아주는 독일통이었다. 고대령은 한국에서 보내온 K-9 설명자료를 일주일 동안 밤을 새다시피 하며 터키어로 번역, 아테쉬 대장에게 제시했다.

고 대령은 K-9 자주포에 대한 실사팀을 한국에 보내 그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한국과 방산협력 여부를 판단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면담시간은 원래 20분이 계획돼 있었는데 질문이 많아 50분이 걸렸습니다.
주로 독일의 MTU 엔진 도입 가능성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분은 이미 어려운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조성태 국방부장관의 터키 방문일정을 물은 뒤 그때 보자고 말씀했을 때, 무엇이 훤히 트이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의 성취감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쾌감입니다.”(고현수 대령)

터키, 국내 실사 후 이스라엘 방문 취소

독일과 터키 지상군사령부 사이에 진행되던 독일의 PzH2000 자주포 공동생산 계획이 독일의 국내 문제로 중단되는 상황이 1999년 하반기에 벌어졌다. 국방부는 K-9의 터키수출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외교 역량을 더욱 강화했다.

조성태 국방부장관의 터키 방문은 11월 17일 이뤄졌다. 19일까지의 방문 중 터키 군부 고위층이 배석한 가운데 열린 양국 국방장관회담에서 조 장관은 군사협력 및 교육협력에 관한 협정과 함께 방산협력 및 방산품품질보증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 양국 간 방산협력의 토대를 다졌다. 참석자들이 K-9 자주포를 소개하는 비디오를 시청하는 가운데, 조 장관은 K-9 자주포의 공동생산이 진행될 경우 한국 국방부의 공식적인 보증을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던 1999년 12월 1일 고현수대령은 터키 지상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K-9자주포를 파악할 실사단을 파견할 의향이 있다며 급히 협조를 부탁해온 것이다. 고 대령은 즉시 국방부 국제협력과 김응천(金應天 해사34기)해병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중령은 12월 12일부터 18일까지 터키 지상군사령부 기술기획부장 아크차이육군준장을 단장으로 한 성능 실사단이 내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빠르고 완벽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아크차이장군 등 터키 실사단은 사실 그때까지도 한국의 K-9 자주포 개발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주일간에 걸친 토의와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에서의 K-9 사격시범과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위아, 풍산 등의 생산시설 견학을 마친 후에는 성능신뢰는 물론 우리의 기술력과 방산 기반에 놀라고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K-9 사격시범 관람 후 상호 인사 및 소개하는 자리에서 아크차이 준장은 ADD 연구진에게 연신 “한국이 세계적 성능의 자주포 개발을 축하한다.”며 K-9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간접적으로 표시하였다. 실사단은 터키로 돌아가 터키지상군사령부에 한국과 기술협력할 것을 건의했다. 이로 인해 당시 터키 실사단은 그들의 자주포 사업과 관련, 이스라엘을 방문키로 했던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는 2000년 2월 K-9의 기술이전 공동생산추진과 관련해 기술평가단을 파견해줄 것을 한국 측에 요청했으며, 이에 국방부는 국방과학연구소 자주포체계팀장을 단장으로 국방부와 업체 등 11명의 기술평가단을 구성, 2월 19일 파견했다.

기술평가단은 터키의 1010창(한국의 종합정비창에 해당하지만 정비뿐만 아니라 개발도 맡는다)을 시작으로 MKEK(터키의 국영 방산 그룹), ASELSAN(전자 회사)등을 방문해 자주포 관련 터키의 방산 수준을 조사하고 양국의 관심사항 및 터키형 자주포 공동개발에 대한 기본방안을 협의했다.

하지만 향후 계획 수립을 위한 일정과 협력방법 등 협의는 난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실사단은 터키자주포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나 양해각서 체결이 합의되어야 공식적인 수출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의록에 양해각서 초안을 첨부할 것을 협의하는 등 험난한 협상을 벌였다.

2월 16일 회의록에 서명을 마친 기술평가단은 이튿날 이스탄불을 문화탐방하면서 과거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키던 오스만터키의 토푸카푸성에 올랐다. 그곳엔 마침 당시 사용하던 대포가 놓여 있었는데, 토푸카푸란 대포와 문이라는 터키어의 합성어였다.

김동수 박사는 “우리는 토푸카푸 회원이다. 우리가 희생과 협조로 노력하면 K-9 수출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앞으로 인사할 때는 ‘토푸’하고, ‘카푸’로 받자.”고 제안했다.

평가단은 사업진행 중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전화를 걸어 해결하곤 했는데, 약속대로 토푸와 카푸로 인사를 나눴다. 기술평가단이 귀국 후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국방부는 한국 측의 양해각서 안을 작성해 터키에보내고 터키측은 수정안을 작성, 보내오는 등 국방부와 터키지상군사령부는 3차에 걸친 협상을 가진 뒤 5월 양해각서(MOU) 체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4월 28일 예기치 못한 돌출 문제가 튀어 나왔다. 일찍이 아테쉬장군이 복선을 깔듯이 고현수 대령에게 집중적으로 질문한 그것으로서, 바로 MTU엔진에 관한 것이었다. 터키는 양해각서 서명 전에 한국정부의 MTU엔진 공급에 대한 보증서를 고 대령을 통해 요구해왔던 것이다.

고 대령은 김응천 중령에게 즉각 연락하고 지상군사령부로 달려가 아크차이 장군을 만났다. MOU체결이 며칠 내로 임박한 상황에서 보증서를 요구하는 것은 MOU체결을 불가능케 하고, 아테쉬 장군의 방한 자체를 연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외교관례상 대단한 결례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결과는 한국 측의 요청대로 일단 MOU를 먼저 체결하고 나중에 엔진공급에 따른 보증서를 받겠다고 아크차이장군이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마침내 5월 4일. 터키 지상군사령관 아테쉬 대장은 한국을 방문하여 터키자주포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5월 8일)하였다. 주요내용은 한국이 K-9 자주포 구성품을 국방부가 지정하는 주계약업체(삼성테크윈)를 통하여 터키에 공급하고 정부 기술자료를 무상 지원하는 조건으로 터키 측으로부터 2011년까지 350문 이상의 물량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MTU엔진이 수출에 장애될 뻔 그런데 바로 그 날, 독일 정부는 K-9 자주포용 독일의 MTU엔진에 대한 대 터키 수출을 승인할 수 없다고 우리 측에 통보해왔다. 한국・터키 양해각서가 체결되기 전 독일의 MTU사(社)는 터키 수출용으로 한국삼성테크윈에 엔진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MTU사로서도 독일정부의 수출 불승인에 어쩔 수없었다. 이것은 독자개발 자주포를 최초로 수출하려는 우리의 희망에 찬 물을 끼얹는 격이 되고 있었다.

K-9수출은 이제 엔진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당면과제를 안게 됐다. 국방부는 MTU 엔진의 수출허가 획득을 위해 청와대를 비롯하여 지원 가능한 모든 기관과 부서의 협조를 강구했다. 방산업체는 업체대로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했다.

2000년 말까지 터키자주포 시제1문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독일 MTU엔진의 대 터키 수출허가를 받아 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K-9의 수출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여기서 ADD와 삼성테크윈의 연구개발진은 기술적 자신감 속에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MTU엔진을 대체키로 하고 실용개발 시 검토했던 영국 퍼킨스사(社)의 엔진을 적용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일정부를 상대로 한 정부차원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2000년 5월 29일 독일의 뮬러 경제부장관의 방한 때에는 외교통상부와 산업자원부에서 MTU엔진의 한국 수출 거부 문제를 현안 의제로 다뤘다. 국방부는 이때 마지막 남은 히든카드를 독일 측에 제시했다. 독일 국방부에 터키 자주포용으로 쓰일 MTU 엔진의 한국수출을 금지할 경우, 타 엔진을 사용할 것임은 물론 한국과 독일과 진행할 각종 협력사업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내용으로 한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다.

정부차원에서 독일과 교섭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터키는 2000년 6월 20일 한국과 시제 1문용으로 K-9의 구성품을 도입하는 계약(335만 달러)을 체결했다. 이어 터키 기술연수생 10여 명이 삼성테크윈에서 기술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7~8월에 한국에서 터키에 공급할 구성품들이 터키로 보내졌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연수생들이 터키로 돌아가 조립하기 시작되었다.

ADD와 삼성테크윈의 연구개발진들도 터키에 파견되어 터키자주포 시제품제작과 조립을 지원했다.
한편 8월, 터키에서는 K-9 방산협력사업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아테쉬 장군의 전역을 맞게 되었다. 그는 전역 전에 전 장성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과 협력 중인 터키형 자주포 사업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속시켜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역 후에도 이 사업만큼은 끝까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했다. 터키 지상군사령관은 평시 막강한 자리지만 일단 전역하면 일체 군무(軍務)에 간섭치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공언은 파격이었다.

하지만 엔진 문제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렇게 문제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던 12월 15일, 드디어 독일로부터 수출허가가 떨어졌다.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차원의 노력으로 주효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기체계 연구개발에 있어서 구성품을 해외 도입할 때는 항상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는 좋은 교훈이 되기도 했다.

10억 달러 수출 ‘신기원’ 이룩하다

2000년 12월 30일 한국과 시제품 계약을 체결한 후 6개월 만에 터키형 자주포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터키는 터키형 자주포를 ‘폭풍(Storm)’이란 뜻의 터키어 ‘Firtina’로 명명했다. ADD는 K-9 자주포의 시험평가기준과 절차서를 영문화하여 터키에 제공했다. 한국 측의 기술지원을 받아 터키포병학교가 주관하여 동계시험, 사격시험, 하계시험이 계획되었다. 1월 말부터 2월 초순까지 동계시험이 추진되었다.

동계시험장소인 사르카므쉬는 터키 동부 산악지역. 해발 약 2,100m나 되고 한겨울에는 영하 40도 이하까지 떨어지고 눈이 많아 겨우내 눈으로 덮이는 곳이다. 터키 측에서는 눈 위에서 기동시험을 가장 중요하고 어렵게 생각했지만 이미 스키장에서 시험을 거쳤기 때문에 시제품의 기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험기간 중에 터키군 총사령관인 크브르크올루 장군(육군대장)이 방문했다. 총사령관은 1km떨어진 곳에 드럼통을 세워놓고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의도가 의아스러웠지만 드럼통을 자주포탄에 그대로 관통되었다. 총사령관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며 지상군사령관에게 터키형 자주포를 포함, 지상화력장비를 모두 동원해 국민들에게 화력시범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총사령관이 든든한 후원자가 된 셈이었지만, 시제품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화력시범을 보이라니,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다. 혹시라도 실수가 나온다면 사업은 어쩌면 ‘끝’을 고할지도 모를 일. 하지만 화력시범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2001년 2월 터키에는 IMF경제위기가 왔었고, 터키군부는 군사비 감축 여론에 직면해 있었다. 터키 군부는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화력시범이었고, 내심 K-9의 터키형으로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 여론을 반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터키 중남부 카라프나르 사격시험장에서 2001년 3월 10~23일까지 사격시험, 4월과 5월초에 섭씨 30도가 올라가는 디야로바카르지역에서 하계시험을 실시한 데 이어 5월 12일 화력시범이 실시되었다.

터키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의장과 장관, 국회의원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특이한 점은 이때 나눠준 모자 정면에는 바로 K-9터키형이 로고로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메모지도 그랬다. 이 때문에 우리 측 관계자 모두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고, 이 수출사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긍지를 느꼈다.

화력시범은 터키 전역에 TV로 생중계되었다. 터키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 지상화기가 차례차례 화력시범을 보였다. 이윽고 이날의 하이라이트로 K9 터키형 자주포가 등장했다. 날렵한 기동시범에 이어 급속사격, 최대발사속도 및 최대사거리 사격까지 완벽하게 사격을 마쳤다.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인사들이 기립해서 성공적인 화력시범에 참가한 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고현수대령은 화력시범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국방부로 이 낭보를 전했다.
화력시범과 시험평가가 성공리에 끝나자 2001년 7월 터키 지상군사령부와 삼성테크윈이 터키 자주포 1차 양산 24문에 대한 공급계약을 6,500만 달러에 체결했다. 우리 방위산업 사상 최대의 쾌거가 성사된 것이다.
2011년까지 350문 이상 10억 달러(1조 3,000억 원)이상의 수출이 예상되었다.

우리 시대의 명품 K-9

이제 ‘국방의 초석’ 국방과학연구소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신형 155mm 자주곡사포 K-9 연구개발돌아보는 연재를 마칠 때가 되었다. 생각해보는 것이, K-9 연구팀이 연구개발 전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연구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를 맞는 가운데 이를 제때 극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때로는 무용하기도 하지만 K-9의 경우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 1998년 10월에 K-9의 개발이 성공리에 마치지 못했다면 아마도 K-9의 전력화가 한참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해 말에 불어닥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태풍과도 같았던 위기 속에 고가 장비인 K-9의 전력화를 위한 양산 결정이 계획대로 이뤄졌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또 이때 완료되지 못했다면 연평해전 등 서해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지 못함은 물론 대화력전을 위한 K-9의 실효성과 우수성을 증명하기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특히나 터키 수출은 실제로 불가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의 기술 지원을 받아 자국의 자주포 개발을 추진하던 터키 육군에 개발상 문제가 생긴 시점이 바로 1998년 말이었다. 따라서 터키가 독일 외 제3국의 파트너를 찾을 때 한국의 우선순위는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필자가 이 K-9 개발스토리를 국방일보에 연재하면서 ‘명품’임을 말할 때, 누군가 무기체계에서 명품이 될 수있는 조건은 무엇일까를 물어왔다.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성능이 우선조건일 수도 있지만 기술력, 전력기여도, 국가경제 기여도 등도 따져봐야 한다. K-9는 이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성능의 자주포는 아니지만 ‘세계 정상급’으로서 손색없는 우리 시대의 자랑스러운 명품 자주포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발 완료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국산 무기체계 중 명품첫번째로 K-9을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외국의 유혹이나 의존도를 떨쳐버리고 독자 개발한 무기체계로서 전력기여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정상급이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해외 수출 면에서 신기원을 이룩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점이 두드러기 때문이다. 마침 올해 ADD가 자체적으로 펴낸 ‘명품무기 10선’ 첫 페이지는 ‘미래전장 환경을 고려한 인간과 기계의 조화’라는 설명과 함께 K-9으로 장식하고 있다. 장기간 연재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국방일보 신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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