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월미도 해상과 자유공원 내 맥아더동상 일대에서는 인천시와 해병대사령부 주관으로 인천상륙작전 59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올해 행사는 역대 해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해병대 전우회, 주한 미 해병대, 미국과 터키 등 해외 참전용사 109명, 우리나라 참전용사 130여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월미도 해상헌화, 맥아더동상 헌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재개관식, 기념식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두들 잘 아시듯이 상륙작전이 있었던 인천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근대와 현대가 만나 격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던 공간입니다. 인천항은 개항 이후 신문물이 밀려오는 통로가 되었으며 일본과 청나라의 조계지가 설치되었던 곳에는 지금도 차이나타운과 각종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59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자유공원은 1883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인천항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가족, 연인들이 한가로이 거니는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잡은 자유공원 정상에는 더슬라스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6.25전쟁 발발 후 연전연패하던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맥아더장군.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긴장감이 감돌던 당시의 인천 앞바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상륙작전의 전초기지를 확보하라
1950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한반도의 전황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유엔이 북한군의 남침을 국제법을 어긴 불법적 침략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파견했지만, 전선은 낙동강에 고착되어 언제 부산이 함락될지 모르는 형국이었습니다.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유엔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은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을 계획합니다.
성공적인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먼저 서울과 인천, 경기 지역에 주둔한 북한군 부대의 병력 규모 등 첩보와 서해안 지역의 조석 등 해상정보를 수집해야 했습니다. 해군의 정보부대와 첩보수집 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 /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해 도서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해군은 ‘Lee Operation'이라 불린 작전을 통해 한국 해군의 PC-702함 등 함정 8척과 영국 순양함 케냐(Kenya), 캐나다 구축함 아다바스칸(Athabaskan) 등의 지원을 받아 8월 18일 덕적도를, 8월 20일에는 영흥도를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팔미도에 위치한 등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팔미도는 위 사진에서 보듯이 인천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대위와 연정 해군소령 등 6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는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9월 14일, 팔미도에 주둔한 경비대를 몰아내고 등대를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9월 15일 0시 12분, 맥아더 장군의 작전명령에 따라 등대의 불빛을 밝혀 인천 해상으로 집결 중이던 상륙함대에 팔미도 등대의 탈환을 알립니다.
성공확률 5000대 1의 도박
인천상륙작전이 최초로 구상된 것은 맥아더장군이 한강 전선을 시찰한 1950년 7월초였습니다. 그러나 ‘블루 하트’(Blue Heart)로 명명된 이 작전은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7월 18일 미 1기병사단이 포항 영일만에 상륙하는 것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전세를 역전시키는 기회를 가져올 인천으로의 상륙을 맥아더장군은 포기하지 않았고,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계획을 세웁니다.
맥아더장군은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주장하나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인천지역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조수 간만의 차와 지형적 장애요인 등을 극복해야 했고, 유엔군 병력이 지나치게 분산되어 고립될 위험 등을 우려한 미 합참은 군산과 주문진을 상륙지역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맥아더 스스로도 5000 대 1의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인천을 강력히 상륙지역으로 주장해 결국 1950년 9월 15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실시됩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미 10군단 병력 약 5만 여명과 유엔군 함정 261척이 동원되었습니다. 한국군은 미 10군단 휘하에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배속되어 참가하고 해군 함정 15척이 함포사격과 상륙지원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유엔군은 2주 후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모든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마침내 전황을 역전시킵니다. 맥아더의 도박은 공산화의 위기에 놓여 있던 한국을 구하며 결국 성공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영웅들
인천상륙작전의 개략적인 전개과정은 이와 같았습니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여겼던 작전을 결국 성공으로 이끌고 단숨에 전세까지 역전시킨 더글라스 맥아더장군. 그는 6.25전쟁의 영웅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한국군에는 그를 도와 싸운 또 다른 수많은 영웅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입니다.
손원일 제독은 인천상륙작전시 미 피카웨이함에 동승하여 한국군 최고지휘관으로서 작전을 지원합니다. 마침내 상륙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손원일 제독은 직접 상륙주정(LCVP)을 타고 해병대 장병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손원일 제독은 해병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전투에 참여합니다.
마침내 서울을 완전 탈환한 9월 28일, 손원일 제독은 서울탈환작전에 참전한 국군 최고지휘관으로서 해군 총참모장 명의의 포고문을 서울시민들에게 발표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맥아더장군은 전사에 남을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승리는 가장 먼저 인천 해안에 상륙하고, 가장 먼저 서울에 입성하여 용감히 싸운 한국군의 이름 없는 장병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59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두의 영웅들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