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평북 정주장학회 이사
최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내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天命, 茶山의 하늘 정약용 250’ 전시회를 찾았다. 올해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탄생 250주년이었고, 정약용 선생님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2012년의 문화인물이어서 더욱 뜻 깊은 전시회였다.
전시회에서는 다산의 친필 저술 가운데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이 특히 눈에 띄었다. 다산이 직접 쓴 한자 한자에 그분의 올곧은 실학 정신이 배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40세이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귀양길에 나섰다. 그분이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가 풀려 꿈에도 그리던 경기도 남양주 마재의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57세이던 1818년이었다.
만 17년의 고난 속에서 정약용은 초기 몇 년간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음식과 풍토가 맞지 않아 큰 고생을 했다. 현지 주민들의 도움으로 지역 음식을 통해 점차 건강을 되찾은 다산은 사색과 정진의 길을 굳건히 정진하면서 집필과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그 가운데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 실학의 대표적인 저서를 제자들과 공동작업으로 일궈 냈다. 다산의 대표적인 실학 저서들이 대부분 유배 생활 동안 저술됐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근거해 학문 체계를 정립한 분이다. 서학에 일시적으로 관심을 둔 적은 있으나 유배 이후에는 철저하게 유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조카 사위인 황사영이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중단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아시아 함대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는 내용을 담아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황사영 백서 사건’(1801년)은 다산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심한 문초 끝에 황사영과 형 정약종은 순교의 길을 택했고, 다산과 형 정약전은 유배의 길을 맞게 됐다.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와 형조 참의를 역임한 명문 사대부에서 하루아침에 폐가가 된 캄캄한 현실에서도 다산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산이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자식들이 유학에 정진해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정약용은 폐가가 된 가문의 후손들이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각종 원예로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는 방법을 자세히 아들들에게 제시했다. 예기치 않게 몰락한 양반이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40세에 시작된 유배가 17년이란 긴 세월로 이어진 것은 다산 개인과 그 가족에게는 고통스러운 불행이었으나 이 시기에 각종 유명한 서적이 다산을 통해 저술되고 후학이 양성된 것은 대한민국에는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의 학문이 이제는 국제적으로 폭넓게 조명받으며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인들에게 널리 전해지고 있다. 큰 불행 속에 처절한 고통의 시기를 보낸 다산이었으나 묵묵한 정진과 부단한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다산의 역전 드라마는 우리 장병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국방일보 201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