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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지휘함인 마운트 매킨리 함에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 으로부터 인천시가에 대한 포격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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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최규봉 씨(켈로부대 출신) 기념식장서 작전개시명령(스위치 작동) ②기념식장서 14㎣ 떨어진 팔미도 등대점화 ③한국·미국·호주 함정서 연막탄 발사 ④수색대원들 지형 살피기 위해 헬기·고무보트 타고 월미도 쪽으로 이동 ⑤공군기 8대 월미도 앞바다 30m 저공비행 ⑥한국·미국·호주 함정서 예포발사, 곳곳서 수중폭발물 폭발 ⑦한국·미국 상륙장갑차 30여 대 기념식장 쪽으로 전진 ⑧한국·미국 헬기 5대 상륙장갑차 엄호 ⑨해병대원 200명 기념식장 쪽으로 접근 ⑩해병대원들 사다리 타고 암벽 오른 뒤 특수분장한 맥아더 장군에 `작전 완료'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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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인천상륙작전 개념도. |
올해 9월 15일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울 탈환과 전면 반격의 발판이 됐던 인천상륙작전의 의미와 성과를 되돌아본다. 편집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발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 부대를 포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 없이 낙동강에서 38선으로 단계적으로 북상했을 경우 소요시간은 30일, 아군 인명 피해는 13만9957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미군 측의 평가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전을 공세작전으로 전환해 전선을 돌파하는 데 필요한 시간만 13일, 예상 인명 피해는 5만8013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금강선을 돌파하는 데 7일의 시간과 3만2534명의 인명 피해, 천안~장호원선과 한강을 돌파하는 데도 각각 5일의 시간과 각 2만4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미군의 추산이었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 후 38선까지 도달하는 데 유엔군과 국군이 입은 전ㆍ사상자는 8478명에 불과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을 때의 추산치와 대비해 겨우 6%에 불과한 인명 손실만으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양영조 박사는 바로 이점이 인천상륙작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양 박사는 “낙동강에서 단순히 총반격으로 38선으로 올라갔을 때와 비교할 때 불과 10여 일간의 전투로 서울 탈환에 성공해 전체 전투일수를 3분의 1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아군 병력 14만여 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평가했다
▶인천상륙작전이 특별한 이유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의미는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그 중요성이 평가절하되던 상륙작전의 유용성이 다시금 부활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과 유럽에서 미군이 전세를 역전시킨 발판은 모두 상륙작전이었다. 하지만 핵무기가 개발된 이후 상륙지점에 단 한 발의 핵무기만 떨어져도 상륙부대가 전멸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륙작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편견을 깨며 상륙작전이 적절한 상황에서 실행될 경우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줬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6·25전쟁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공산군 측은 무려 전력의 50%를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에 빠져든 것”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6·25전쟁의 결정적 작전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극심한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 새벽과 오후 두 단계로 나눠 상륙전을 진행해야 하는 특수한 해양 환경, 항구 안벽으로 상륙전을 감행해야 하는 제약 등 수많은 제약사항을 극복하고 이뤄진 작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모험적인 작전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에 아군의 성공 비결이 있다”는 오랜 군사 격언을 20세기 전쟁에서도 재입증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인천항 앞 월미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열렸다. 5시 50분부터 순양함의 함포 사격이 개시됐다. 6시 30분 미 10군단 예하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가 상륙을 시작, 월미도에 설정된 상륙예정 장소인 그린비치(Green Beach)에 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 어떻게 진행됐나
미 해병대는 미군 전차의 도움을 받아 동굴 속에 숨어 저항하는 북한군을 소탕해 나갔다. 미 해병대는 함포사격과 화염방사기 등 압도적 화력으로 북한군의 거센 저항을 제압, 7시 50분 무렵에는 월미도 전체를 탈환했다.
미 해군 순양함 마운트 매킨리 함 함상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맥아더 원수는 “오늘 아침 미 해군·해병대는 영광에 빛난다”는 메시지를 장병들에게 전했다.
이날 오후 5시 30분, 밀물이 들어오자 도일 해군 소장이 마침내 “상륙군 상륙”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 해병5연대와 국군 해병3대대는 수송선에서 내려 상륙주정에 옮겨 탄 후 인천항 북쪽의 레드 비치(Read Beach)로 쇄도해 들어갔다.
미 해병1연대와 함께 인천 남쪽에 블루 비치(Blue Beach)로 명명된 상륙지점에 상륙을 시작했다. 해병5연대는 사다리로 방파제 벽을 올라가서, 20분 후에는 첫 목표지점을 점령했다. 미 해병대가 인천 외곽으로 치고 나간 후 한국 해병대는 인천 시가지에서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등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9월 22일부터 낙동강의 북한군이 무너지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의도했던 목적이 달성되기 시작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일단 북한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거침없이 북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개전 초반 북한군의 남침 속도보다 몇 배 더 빠른 반격이었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의 미8군 예하 부대가 수원과 오산 사이에서 마침내 합류한 것은 9월 26일 무렵의 일이었다. 낙동강의 북한군 주력은 독 안에 든 쥐의 꼴이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180도 역전됐다. 서울을 방어하던 북한군 18사단은 거센 저항을 계속했지만, 9월 28일 국군과 미군은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5000분의 1이라던 맥아더 원수의 대도박은 미군과 국군의 선전으로 마침내 눈앞의 현실이 됐다.
<국방일보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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