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로 맺어진우방 - 불의의 패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 1950년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하는 美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전세가 극히 악화되고 있던 7월 1일, 일본의 북큐슈에서는 빗속에서 출동을 서두르고 있는 부대가 있었다. ‘Smith 특수임무부대’. 맥아더 장군이 약속한 주일 미 지상군의 선발 제1진이었다. 이들 병력은 미 제2 4사단에서 선발한 장병 4 0 6명으로 사단장 딘 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기로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미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것이다.
S m i t h대대는 박격포, 무반동총 말고도 1 0 5밀리포 6문의 포병 1개 대대를 배속받고 있는 등, 대대급 규모로는 상당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전차화기는 2 . 3 6인치 바주카포 6문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2 . 3 6인치 바주카포로는 북한군 T- 3 4형 전차를 파괴할 수가 없어,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군사령부에 3 . 5인치 로켓포를 급송토록 긴급 요청하였다. 이 3 . 5인치 로켓포는 미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개발한 신형이며, 당시 본격생산에 착수한 지가 얼마되지 않아 해외주둔부대에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마저 급거 공수되어 온 것은 그로부터 1 2일 뒤 인 7월 1 5일로써, Smith대대의 초전에는 투입되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최초의 접전에서 북한군의 전차를 막아내지 못하게된다.
북한군이 수원까지 내려와 있었던 7월 4일, Smith대대는 대전에서 9 0여킬로 북쪽의 오산 죽미령에 포진하였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죽미령은 미군부대가 포진할 수 있는 가장 북쪽이었다.
7월 5일, 최초의 일전에서 S m i t h대대는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배는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었다. 당시 미군하면 세계 최강의 화력과 장비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던 터에 공산군과의첫 전투에서패했다는것은 미군은물론우리 정부와군에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이때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대대장 스미스중령 이하 장병 모두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북한군을 3류군대 쯤으로 얕보고 있었다는 점, 더구나 5년 동안이나 일본을 점령하면서 긴장이 풀어졌고 장병 대부분이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전후(戰後) 보충된 신병이었다는점 등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이 최초 전투에서의 패배는 도쿄 미 극동군사령부는 물론 워싱턴의 미 합참까지 경악하게 하였다. 도쿄의 미극동군사령부는 미 본국에지원병력의 긴급증파를 요청하였다.
워싱턴 당국은영국, 프랑스와 공동으로유엔안보리의 소집을제안했다. 이에 따라소집된 안보리는 7월 7일“미합중국으로 하여금 유엔군 통합사령부를 설치케 하고, 사령관 임명권을 부여하며 유엔기 사용을 허용한다”라는 내용의 결의를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을 사상최초의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유엔군 통합사령부 설치안을 유엔총회 역시 5 2대 7로 가결했다. 당시 유엔 가입국 5 9개국 중 5 2개국이 찬성하고 반대는 공산권 7개국 뿐이었다. 북한의 불법남침에 대해 세계 자유진영이 단호하게 결속하여 대응하게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 국가가 전투부대를, 스웨덴 등 5개국이 의료단을 파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