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국방정책관실 미국정책과 발행 -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1. 피로 맺어진우방 -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 전투
미 제1해병사단 : 전사 7 1 8명, 후송후 사망 9 8명, 실종 1 9 2명, 부상 3 , 5 0 4명의 전투손실과 비전투손실 3 , 6 5 9명(대부분 동상)”
중공군 : 전사 2 , 5 0 0여명, 부상 1 2 , 5 0 0여명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장진호에 배치되었던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 극한적인 상황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소위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쌍방 피해 결과다.
▲ 미국인들은 장진호 전투를“Chosin Reservoir Battle”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당시 일본인들이 제작한 지도의 지명이기 때문에 미군의 용어가 된 것이다. 장진호 지역은 개마고원에 있는 해발 1 , 0 0 0 m가 넘는 산악지역으로 당시 낮에는 영하 2 0도 밤에는 영하 3 2도
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되었다. 병기는 얼어붙고 특히 방한피복이 절대 부족하여 쌍방 군대 절반 이상이 심한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최악의 조건속에 서도 미 제1해병사단은 단 순한 철수가 아닌‘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an attack in another direction)이라는 스미스 사단장의 강철같은 의지 아래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 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장진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참전용사들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지난 1983년 4월 6,000여 회원으로 구성된 생존자협회를 결성하고 그 명칭을 장진호 전투에서 아주 적게 살아남았다는 뜻을 담고자「Chosin Few」라고 붙였다.
「Chosin Few」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5 2개 지부를 두고 전쟁포로 문제와 동상 후유증치료 등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또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한국 재방문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일부 회원들은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후세에남기기 위해책을 썼다. 수기로는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의『포위망 탈출( B r e a k o u t )』,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의『지옥보다 더한 추위( C o l d e rthan Hell)』, 소설로는 장교 출신인 제임스 브래디의『가을의 해병(The Marines of Autumn)』등이 있다. 이 책들을 소개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밤새 통곡하며 읽었다”는「Chosin Few」회원과 가족들의 독후감이 많이올라와 있다.
5 0여년전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 쓰러져간 용사들과 처절했던 당시 기억을 간직한 채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는「Chosin Few」회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며 그 분들에대한감사함 그리고 자유의소중함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