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주차 기본정훈-제7과 자유를 지켜낸 6·25전쟁 / 국방일보
18주차 기본정훈 ‘자유를 지켜낸 6·25전쟁’은 공주대 안보과학대학원 정명복 교수가 강의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기습적인 무력남침을 감행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1000여 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과거 6ㆍ25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 북침설, 내전설, 유인설 등 다양한 추론과 가설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통령 문서보관소에 있던 비밀자료, 북한의 전투명령 1호 등 다양한 증거들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남침이었음이 입증된 바 있다.
6ㆍ25전쟁에 대한 역사적 견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ㆍ25전쟁은 김일성이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하였으며, 모택동이 지원한 남침전쟁이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소련의 팽창정책과 이를 막기 위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대립하면서 냉전체제로 진입하였다.
그 가운데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10월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한반도 공산화를 추진할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1950년 1월 중ㆍ소 우호동맹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이 그러한 생각을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6ㆍ25전쟁은 한반도 공산화를 계획하고 끈질긴 승인을 요청한 김일성과 세계 공산혁명을 꿈꾸며 전쟁을 승인한 스탈린, 그리고 중국대륙을 공산화시킨 모택동이 지원한 ‘남침전쟁’이었다. 이는 각종 사료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다.
6ㆍ25전쟁 마지막 승전이 기록된 425고지 전투 전적비. |
둘째, 6ㆍ25전쟁은 김일성이 남한 내 좌익세력을 믿고 잘못된 판단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당시 김일성은 만일 전쟁이 발발하면 남쪽에서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949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을 요청하면서 “우리는 남측 내의 강력한 유격대운동(빨치산)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으며, 친미정권을 경멸하는 남쪽 주민들도 분명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설득할 때도 “공격이 개시되면 틀림없이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 인민봉기가 남반부에서 분출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전 정치ㆍ사회분야에서의 남로당 제거작업과 함께 국군내 좌익세력 제거작업을 추진함으로써 전쟁 중 좌익세력의 폭동을 사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세대 전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6ㆍ25전쟁은 남한 내 좌익세력을 믿고 잘못된 판단으로 일으킨 열전(熱戰)인 것이다.
셋째, 6ㆍ25전쟁은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도발에 맞서 싸운 자유수호전쟁이며, 자유진영이 승리한 전쟁이다. 이승만 대통령 등 건국 지도자와 선열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63개국들도 유엔 창설 이후 첫 유엔군 파병을 통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자유진영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만일 건국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결연한 호국(護國) 의지가 없었다면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6ㆍ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공산세력 확산을 초래했을 것이다.
60여 년 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선배전우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와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국제사회와 선배 전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북한이 또다시 도발해 온다면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일전불사의 의지와 싸워 이기는 능력을 구축하는 것이야 말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임을 잊지 말자.
6·25전쟁 당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