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무기 판치는 전장서도 여전히 공포의 대상 … 한국군도 최근 들어 양성 돌입
2007년자료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팀 기자 hoon@donga.com
2월중순 개봉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5년 2월 미국 해병대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장악한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를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섬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데, 그때 종군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다.
며칠 후 미국 신문에는 네 명의 해병대원이 이 섬 정상인 스리바치산에서 성조기를 건 녹슨 파이프를 일으켜 세우는 역동적인 모습의 사진이 실리는데, 이 사진이 전쟁에 지쳐가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었다. 영화는 이 사진이 전투가 끝난 뒤 따로 연출됐다는 것을 밝히고 동시에 해병대원들의 전우애를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에서는 상륙전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하 참호에 몸을 숨긴 일본군(栗林兵團)은 수일간 계속된 미 해군 항공대의 융단폭격과 함정의 함포 사격을 견뎌낸다. 그러고는 미 해병대원들이 돌격 상륙해올 때, 비로소 총구를 내밀어 정조준한다. 가장 먼저 노리는 것은 소대장과 기관총 사수, 통신병, 의무병이다. 네 사람이 쓰러지면 소대는 ‘머리 잘린 뱀’처럼 공황에 빠진다. 한 발에 한 명씩, 실패는 없다.
미군, 이라크전서 저격수들에게 혼쭐
저격수를 가리키는 영어 ‘스나이퍼(sniper)’는 도요새를 뜻하는 ‘스나이프(snipe)’에서 나왔다. 물가에 사는 예민한 도요새를 잡으려면 위장복을 걸친 사냥꾼은 오랜 시간 잠복해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한 발에 반드시 한 마리를 떨어뜨려야 한다.
전쟁이 첨단무기의 경연장이 된 가운데 고전적 요소인 스나이퍼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나이퍼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는 것은 이라크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이라크 평정 작전이 펼쳐진 2004년 11월11일 무장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팔루자에 진입한 미 해병대 2사단 8연대 1대대의 브라보 중대원 150여 명이 구식 소총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라크 저격수(들)에게 꼼짝도 못한 적이 있다.
팔루자는 도시지역이라 ‘저격수의 천국’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저격을 두려워한 브라보 중대가 사전 제압을 요청하자 공격헬기가 날아와 저격수가 은신해 있을 것 같은 건물에 미사일 공격을 퍼붓고, M1A2 전차도 달려와 10여 발의 직사포를 날렸다. 적 잠수함을 잡는 데는 아군 잠수함이 최고이듯, 적 저격수를 잡는 데는 아군 저격수가 최적이다. 브라보 중대는 요소요소에 저격수를 배치했는데, 그러고도 의심스러워 미심쩍은 지점을 향해 3만여 발의 소총탄을 퍼붓고 조심스럽게 전진해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발의 총성이 울리며 두 명의 해병대원이 고꾸라졌다. 헬멧과 방탄조끼를 입은 해병대원을 즉사케 하려면 안면부를 향한 초정밀 사격을 해야 한다. 조준경을 단 저격수만 할 수 있는 솜씨.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에 이라크 저격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 대원들이 은폐할 만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긴 정적.
신경이 곤두서기는 뒤쪽에 숨어 있는 해병대 저격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는 건물 잔해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총구를 겨눴으나 조준경으로 확인한 것은 고양이였다. 그리고 아무 움직임도 발견되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브라보 중대다. 이들이 조심스럽게 다시 이동을 시작하자 “탕!”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대원이 쓰러졌다.
그제야 해병대원들은 모스크의 탑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느꼈다. 미군은 처음부터 반군이 그곳에 은신해 있을 것으로 의심했으나, 이라크인의 반발을 의식해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브라보 중대가 꼼짝달싹 못하는 지경이 되자 금기를 깨고 포 사격을 퍼부어 이 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다시 전진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모스크에서 총알이 날아와 해병대원을 쓰러뜨렸다.
월남전서 저격수 두 명이 중대병력 몰살
이날 브라보 중대는 5시간 동안 ‘엎드려 있다’가 철수하고 말았다. 단 한 명의 반군 저격수도 발견하지 못한 채…. 세계 최첨단 장비와 최고의 용맹을 자랑하는 미 해병대가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 저격수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을 적 저격수에게 당하기만 하는 둔중한 ‘엉클 샘’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저격수 운영에 관한 한 미군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1966년부터 두 차례 베트남전에 참가한 카를로스 해스콕 상사는 미 해병대가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저격수다. 67년 그는 라오스를 돌아 북베트남으로 잠입해 800야드(약 731m) 떨어진 곳에서 월맹군 장성을 사살하고 무사히 빠져나와 일약 스타가 됐다. M-16 소총의 유효사거리는 460m. 그러나 사람 눈은 100m가량 떨어진 표적의 얼굴도 확인하기 힘들다. 800야드 사격은 고배율의 조준경이 달린 소총을 가진 노련한 저격수만이 할 수 있는 솜씨다.
해스콕은 월맹군 저격수와 숨바꼭질하는 ‘저격수 대결’도 벌였는데, 이때는 500야드(약 457m) 떨어진 곳에서 월맹군 저격수의 눈을 꿰뚫었다. 저격수는 보조 저격수 역할을 하는 관측수(spotter)와 한 조로 움직인다. 1969년 6월 해스콕은 관측수인 존 버크와 함께 다낭 공군기지 북쪽 지역에서 중대 병력의 월맹군을 몰살한 기록도 갖고 있다.
이 사건은 ‘코끼리 계곡’에 잠복해 있던 이들이 논이 펼쳐진 개활지를 향해 일렬로 전진해오는 월맹군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800야드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이들이 선두에 있는 지휘관과 후미에 있는 부사관을 동시에 사살하자, 깜짝 놀란 월맹군이 바닥에 엎드렸다. 잠시 후 몇몇이 총알이 날아온 곳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가 머리통이 날아갔다.
월맹군은 논바닥에 괸 물로 염천(炎天)의 더위와 갈증을 달래며 어둠이 내릴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둠도 그들의 탈출구가 되지 못했다. 영리한 해스콕이 본부에 조명탄을 쏘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 저격수는 야간 조준경을 갖고 있어,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는 조명탄 불빛으로도 충분히 먹이사냥을 할 수 있다. 논바닥에 엎드린 월맹군은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상대가 겁먹었다는 것을 안 해스콕과 버크는 교대로 가면(假眠)해가며 계속 감시했고, 해병대 본부는 저격수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닷새가 지나자 해스콕도 힘들었는지 본부에 포 사격을 요청했다. 잠시 후 목표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포병은 ‘효력사(效力射)’라고 불리는 정밀사격을 퍼부어 한 명(그는 생포됐다)을 제외한 전원을 사망케 했다.
2005년 이라크 반군은 알 자지라 방송 등을 통해 반군이 생포한 인질범을 살해하는 비디오를 공개하는 한편, ‘주바’라는 이름의 반군 저격수가 143명의 미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반군은 미군과 미국민을 위축시키기 위해 심리전을 펼친 것인데, 이에 미군도 방송 심리전으로 대응했다.
2006년 1월 미군은 ‘디펜스 뉴스’와 CNN 방송을 통해 ‘섀도’란 이름의 저격수 부대 소속의 짐 질리란드 하사가 M-24 소총으로 3030피트(1250m) 떨어진 병원 4층에 숨어 있던 반군 저격수를 사살한 것을 보도케 했다. 질리란드 하사의 ‘원 샷, 원 킬’은 미군 역사상 가장 먼 거리에서 목표물을 날린 것이라고 한다.
사수인 저격수와 조수인 관측수로 구성된 현대의 저격조는 킬러의 기능만 하지 않는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이들은 비전투 지역이지만 전투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우회 침투한다. 그리고 10여 m 앞에서도 보이지 않는 비트에 들어가 잠복한다. 잠복한 곳에 폭격이 일어나도 이들은 은신처를 벗어나지 않는 ‘닌자(忍者)’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들은 적정을 살피는 정찰수가 된다. 전투를 지휘하는 최고 지휘자인 대대장은 본부에 있어, 중대장과 소대장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중·소대장이 무전으로 알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전장 상황을 이해하는데, 이때 적 저격수가 중·소대장이나 통신병을 사살해버렸다면 그는 완전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 저격조가 전투 상황을 알려준다면 대대장은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저격조가 요청하는 대로 포 사격을 해주면 아군 작전은 훨씬 안전해진다. 저격조는 저격보다 첩보수집과 전장 상황 파악에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화한 첨단무기가 많아도 아날로그형 전문 킬러한테는 당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에 주요 국가의 군대는 저격수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미군은 1987년부터 보병학교 안에 저격수 과정을 만들어 킬러를 양성하고 있고, 영국군은 모든 소총에 조준경을 달아 전 장병의 저격수화를 시도하고 있다.일본 육상자위대도 저격수 부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제야 스나이퍼의 가치를 발견해가고 있다. 한국군의 무지를 보여준 사례가 2006년 8월31일 강원 양구군에 있는 21사단 GP 피격 사건이다.
이날 북한군은 2000m쯤 떨어진 그들 초소에서 두 발의 실탄을 발사했는데, 두 발의 총알이 GP 옥상에 있는 부식창고를 정확히 맞혔다. 이러한 사격은 고배율의 조준경이 달린 저격수용 총을 사용하는 전문 저격수만 할 수 있는 솜씨다. 북한군은 과거 김일성이 중국 공산군의 ‘88저격여단’에 속해 있었기에 저격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분대당 한 명꼴로 저격수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21사단 GP는 조준경도 없고, 유효사거리가 1100m에 불과한 M-60 기관총을 여섯 발 갈기는 것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상대는 초정밀 사격을 자랑했는데 우리는 목표점까지도 가지 못하는 ‘대충 쏴’로 대응한 것.
저격수는 특등사수이자 통신사, 정찰요원, 포 사격을 유도하는 관측사 등 다양한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한국군은 ‘특등사수=저격수’라는 구태의연한 인식만 유지해왔기에 이런 대응을 하고 만 것이다.
한국군은 ‘저격수 전도사’로 불리는 황광한 예비역 준장(육사 17기)의 주장에 따라 비로소 저격수의 가치에 관심을 보였다. 2005년 해병대가 먼저 해병교육단에 저격수 과정을 만들고, 이어 육군이 교육사에서 저격수 과정을 잠정 편성했다. 이라크에 간 자이툰 부대도 황씨의 이야기를 듣고 사단장 기밀비를 털어 황급히 저격수용 총을 마련했다고 한다.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한국군이 저격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행이라는 지적이 많다.
미군 저격수 질리란드 하사가 1250m 거리에서 적 저격수를 사살하는 데 쓴 M-24 저격수용 소총
인터뷰 - ‘저격수 전도사’황광한 예비역 준장
“저격수 조건은 사격실력과 전우위한 봉사정신”
- 방어전 때 저격수의 가치가 높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공격전일 때도 저격수는 유용한가.
“공격전은 익숙지 못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돌연 표적’을 만나게 된다. 돌연 표적은 적 기관총 진지 등을 의미하는데 이곳에서 날아온 총탄에 소대장과 통신병 등이 희생되면 소대는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 돌연 표적을 발견하지 못해 소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전투지역 바깥에 침투해 있던 저격수가 단박에 기관총 진지를 날려버린다면 위기에 빠진 소대를 구출해낼 수 있다.”
- 저격수를 다용도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새롭다. 저격수는 어떻게 양성해야 하는가.
“먼저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특등사수라야 한다. 미국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인도 참가하는 윔블던컵 장거리 사격대회가 있는데, 여기서 저격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리크루트(recruit)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K-2 소총 사격장은 많아도 사거리 1000m 이상의 장거리 사격을 할 수 있는 사격장은 없다. 저격수가 될 사람은 침착하고 아군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식이 강해야 한다. 사병과 부사관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사람을 뽑아 전문적인 교육을 시킨 후 대대에 배속한다면 한국군은 큰돈 들이지 않고도 전력을 배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