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습니다-최규봉 KLO 부대 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인방사 박주미 대위·김기찬 상병 / 국방일보 2012.08.10

 

1950년 9월 15일 새벽 1시 45분 높이 7.9m, 지름 2m의 팔미도 등대에 환한 불이 켜졌다. 미군과 한국군 10여만 명, 261척의 연합군 함정을 인천으로 인도하는 빛이자,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위기에 처했던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의 길로 이끄는 불빛이었다.

 바로 그 불을 켠 인물이 현재 KLO(켈로ㆍKorea Liaison Office) 부대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인 최규봉(89) 씨였다. 미군 소속 특수부대인 KLO 고트부대장, 8240부대 공작과장 등으로 재임한 최 회장은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6월 22일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하는 영광을 안았다.

해군인천해역방어사령부 소속의 박주미(30) 대위, 김기찬(22) 상병과 함께 최 회장을 만나 6·25전쟁 당시의 비사를 들어봤다.

최규봉(가운데) KLO 부대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 서울 신당동 자택 인근을 산책하면서 해군인천해역방어사령부 소속 박
주미(왼쪽) 대위와 김기찬(오른쪽) 상병에게 6ㆍ25전쟁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대 요원 중 훈장받은 사람 아직까지 혼자뿐 숨겨진 ‘군번없는 용사들’ 공적 인정받았으면
최규봉 회장이 수훈한 충무무공훈장(오른쪽)과 맥아더 원수의 사인이 들어간 사진 사본.

박주미 대위 : 훈장 수훈 축하부터 드립니다. 62년 만에 받으신 훈장인데요.

최규봉 회장 : 제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6·25전쟁 당시 음지에서 활약했던 KLO 부대의 공적이 인정받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수많은 KLO 요원들이 전쟁 중 북한에 침투해 위험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적의 움직임과 군수 물자 이동 상황을 파악ㆍ보고했습니다. 그렇게 수집한 첩보는 유엔군 작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KLO 부대 요원 중에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아직 저밖에 없습니다. 당시 부하들도 그에 합당한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활약상이 전사(戰史)에 좀 더 체계적으로 반영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 대위 :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으셨는데, 당시 작전은 매우 비밀스럽게 추진되었을 것 같은데요.

최 회장 : 물론입니다. 7월 말에 원래 어선이지만 비밀첩보선박으로 징발된 백구호를 부산에서 타고 서해로 가라고 하더군요. ‘미처 피난하지 못해 서울에 남아 있던 유명 여류시인인 모윤숙 여사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나중에서야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한 허위 명령임을 알았지 당시엔 진짜 명령으로 생각했죠. 공산군들이 우글거리는 서울에서 시인을 구출하는 것은 현실성 없었죠. 그래서 서해에 도착한 후 상부에 복귀 요청을 했는데, ‘근처 영국 구축함으로 이동하라’는 추가 지시가 내려 와요. 가 보니 미군 장교들도 있는데 해양ㆍ통신 등 분야별로 깊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더군요. 그제야 인천과 주변 지역의 해양 상태와 적 방어태세를 조사하라고 명령하더군요.


김기찬 상병 : 그럼 그때쯤이면 상륙작전을 짐작하셨는지.

최 회장 : KLO는 첩보 수집이 주 임무이기 때문에 당장 특정작전을 시행하지 않아도 첩보를 수집할 수 있어요. 그러니 바로 상륙작전을 떠올리진 못했죠. 하루는 미군 장교에게 ‘첩보를 수집할 만큼 했으니 복귀하자’고 주장했죠. 그랬더니 ‘중요 임무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못 믿겠다’고 했더니, ‘뭐 원하는 것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시원한 맥주나 마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몇 분 뒤 비행기가 날아와서 영흥도에 술하고 담배를 공중에서 투하하더군요. 미군 장교가 웃으면서 ‘이제 상부에서 우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믿겠느냐’고 하더군요. 그제야 무언가 중요작전을 준비 중이란 걸 깨달았죠. 그 지역에서 중요작전이라면 인천상륙이죠. 그제야 온 몸이 굳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 대위 : 인천상륙작전 직전 1950년 8월 영흥도에서 어떤 작전을 수행하셨는지.

최 회장 : 상륙작전을 하려면 해양 정보부터 적 주둔 위치 등 여러 정보가 필요하죠. 우선 저는 미군 해양 전문가들과 함께 수심을 측정하는 등 해양 정보부터 파악했습니다. 동시에 북한군 정보도 수집했죠. 인력이 부족해 주민들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마침 보니 주민들이 먹지 못해 누렇게 부어 있더군요. 미군들에게 쌀 70가마를 요청했더니 16시간 만에 부산에서 쌀을 가지고 오더군요. 그걸 주민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그때부터 자원해서 우리를 돕는 주민들이 나왔죠. 당시 북한군들은 돛대에 붉은색 천을 매단 배들은 어민들 배로 간주해서 따로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영흥도 주민들이 마치 북한 점령지역 주민인 것처럼 천을 매달고 인천 앞바다를 오가며 정보를 구해 왔습니다. 그렇게 세부적인 정보가 쌓여갔죠.
 

박 대위 : 가장 결정적인 팔미도 등대 점등은 어떻게 진행된 건가요. 

최 회장 : 9월 15일 0시에 팔미도 등대를 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전투를 해서 점령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은밀하고 신속히 점령하는 게 중요했죠. 우물쭈물하다간 팔미도의 북한군 경비병들이 육지로 연락해서 인천 쪽 적들이 대응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단정을 타고 들어가다 섬에서 1.5㎞ 떨어진 지점부터 동력장치를 끄고 노를 저어서 들어갔습니다. 총기도 소음장치가 달린 기관단총을 휴대했고요. 북한 경비병 몇 명은 사살하고, 몇 명은 도망치다 바다에 빠지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는 등대로 달려갔죠.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사전에 팔미도에 잠입해 점검했을 때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막상 실제론 등대가 켜지지 않더군요.
 

박 대위 : 등대가 고장 나 있었군요.

최 회장 : 네. 작전에 앞서 반복 연습을 통해 눈을 감고도 등대 각 부분의 위치와 부품을 찾아낼 정도로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등대 램프와 연료탱크를 연결하는 드레인 노즐에 밸브가 없는 겁니다. 그곳으로 연료가 빠져버리니 켜질 리 없죠. 시간은 흐르고 밸브 하나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지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께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렇게 무릎 꿇고 있는데 콘크리트 바닥에서 무언가 딱딱한 게 잡히더군요. 밸브였습니다. 끼워 보니 딱 맞았습니다. 울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실제 등대 점등 시간은 15일 오전 1시 45분이었습니다.
 

김 상병 : 시간을 맞추지 못한 셈이네요. 

최 회장 : 늦었으니 질책받을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데 상부에선 칭찬만 하더군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시간 여유를 두고 작전시한을 정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 작전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이야기죠.


김 상병 : 상륙작전 성공이 정말 감격스러웠겠습니다.

최 회장 : 물론이죠. 15일 오전 11시쯤 작은 배 한 척이 와서 우리를 태우고 큰 군함 쪽으로 가더군요. 탑승해 보니 맥아더 원수가 탄 기함이었습니다. 작전에 투입된 한국인 중에 저와 계인주 대령, 연정 소령 3명이 극동사령부 정보참모인 윌로비 장군 방으로 불려 갔습니다. 대뜸 윌로비 정보참모가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사정이 있어 당시 현역이 아니던 두 분은 ‘국군 현역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팔미도에 게양한 성조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상징물을 갖고 싶었던 거죠. 윌로비 장군이 뜻밖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소원을 들어주면 다른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자 윌로비 장군이 아래 층의 맥아더 원수 방으로 내려갔다 오더군요. 직접 말은 안 했지만 맥아더 원수에게 허락을 맡으러 간 것 같았습니다.
 

김 상병 : 지금도 그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나요.

최 회장 : 아닙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성조기에 관심 가진 사람이 많더군요. 한 미국 기자는 10만 달러에 판매하라는 제의도 했습니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을 생각해서 받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했죠. 그러다 맥아더 원수가 퇴임해 외로운 야인이 된 걸 보고, 조건없이 돌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미 육군에 돌려주는 방법도 있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원수에게 돌려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맥아더 원수처럼 훌륭한 장군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존재했겠습니까. 그래서 1955년 검은 자개함에 곱게 접어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장군께 보내드렸습니다. 그 냉철하고 자존심 강한 장군이 성조기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맥아더 장군은 ‘나의 사랑하는 영원한 친구’라고 자필 사인한 자기 사진을 선물로 보내 줬습니다. 그 사진은 지금 우리나라 전쟁기념관에 보관 중입니다.
 

박 대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나온 책을 보니 1952년부터 1953년까지 KLO 부대 요원들이 보낸 첩보가 한미 양국 전체 획득 첩보 건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더군요.

최 회장 : KLO 부대는 첩보 임수가 주 임무였지만 다양한 특수작전을 펼쳐 우군 작전에 기여했습니다. 52년 말에는 적 후방지역인 황해도에서 북한군 연대장급 2명을 잡아서 데려온 적도 있습니다. 막대기 두 개를 세워놓고 그 사이에 적 포로를 묶은 뒤 미군 비행기가 갈고리로 채가는 방식으로 우리 지역으로 데려 왔죠. 기상 상태를 식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 요원들을 북한에 투입해 미 5공군에 기상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휘한 무선기상정보공작대의 활약에 고마움을 표시한 미 의회의 감사 서신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박 대위 : 임무수행 과정에서 우리 군과의 접촉은 없으셨는지요.

최 회장 : KLO 예하 부대 중에는 서해에 있는 섬들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부대도 있었는데, 한국 해군 함정이 보급품 수송에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위험지역에서도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내는 해군 장병들의 활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께서는 인격적으로도 탁월한 지휘관이셨지만 첩보 작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해주신 분이셨습니다.

 
박 대위 : 장병들에게 당부 말씀을 하신다면.

최 회장 : 제 고향은 함경도 원산입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그곳에 소련군이 진주했죠. 공산주의의 원조 격인 소련의 군대는 약탈자 그 자체였습니다. 주민들의 물건을 약탈하고, 행패도 심했습니다. 그 꼴을 보고 공산주의의 실상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죠. 결국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실상을 두 눈으로 직접 접한 저로서는 장병들이 북한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점을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더 당부한다면 무엇보다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장병들이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군인은 패기 있고, 당당하며, 용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이 꼭 가져야 할 자질입니다.

  
최규봉 명예회장은?

최규봉 KLO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은 192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반공 활동을 펼치다 소련군에 체포됐다. 탈출 후에 38선을 넘어 반공단체에서 활동하다 1946년부터 미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했다. 6·25전쟁 중에는 미군 KLO 예하 고트부대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군 관련 첩보 수집에 공헌했다. 지난 2008년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밑거름 역할을 한 공적과 KLO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제공함으로써 해군작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명예해군으로 위촉됐다. 지난 2010년 인천상륙작전 성공 60주년을 기념하는 재현행사 때도 초청받아 팔미도 등대를 점등해 재현행사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지난 6월 22일 팔미도 등대 점등 등 6ㆍ25 당시 공적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정리=김병륜ㆍ사진=정의훈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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