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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병대령 박형건

 

월남의 어제와 오늘


나는 월남전에 소대장(1965), 중대장(1970)으로 두 번참전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 다시 월남 땅을 밟은 것은 37년 만이었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의 월남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쳤다.


오늘의 월남(통일 베트남)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개혁, 개방을 하고 있지만 외관상의 모습은 별로 달라 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처와 달라진 모습은 너무도 많았다.


우선 나라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분단된 국가로 북은 월맹, 남은 자유월남이었으나 자유월남은 간데없고“Vietnam”이라는 통일된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가되었다. 자유월남의수도였던사이공시는호치민시로 바뀌었다. 티우 대통령인 살던 대통령궁은 통일궁으로 바뀌었고, 거기에는 통일 대통령인 호치민의 영정과 동상이 자리 잡았고 이제는 관광지가 되었다.


우리는 당시 월남 수도 싸이공으로부터 불과 40㎞떨어진 곳에 월맹군과 베트공에 의해 구축된“구찌터널”을 답사 했다. 수도 싸이공 코앞에 월맹군 약 2개사단이 주둔할 수 있는 땅굴이 구축되었음을 미군과 월남군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놀라움을 더했다. 체구가 작은 월남인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땅굴을 60대 후반의 내가 사무국장들과 같이 속옷까지 흠뻑 젖어가며 기어서 30여분간 실전체험을 해본 것은 잊지 못할 값진 추억이다.

 

한국군이 걸어온 발자취 답사

 

우리는 다음 일정으로 당시 월맹과의 접경지역 이었던 북부 다낭 지역으로 향하였다. 이 지역에는 당시 월남군 최정예 1군단, 미 육군 24군단, 미해병대 제3상륙군사령부가 위치하였고, 약 20㎞ 남쪽 호이안은 해병대청룡부대 작전지역 이었다.

 

나는 중대장을 마치고 미 해병대 제1사단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었기에 다낭은 남다른 감회가 깊었던 곳이다.
미해병대 비행단이 위치하던 마블 마운틴(Mablemountain) 정상에서의 다낭 시가지 관망은 평화스럽기만 했다. 살벌했던 전쟁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지금은 호텔과 휴양콘 마블 마운틴(Mablemountain)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道) 만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남쪽 청룡부대가 위치하고 있던 호이안시 까지는 신설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관광객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청룡부대 본부의 모습은 간데없고 청룡마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파괴된 채 쓰러져 있는 정문 기둥이 유일한 흔적이었다.


내가 중대장을 하던 라이니 부락을 지날 때는 또 한번 감개무량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중대장을 하면서 주로
적성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과 현지 보급품 및 식량을 조달하는 하미타이 호수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는 매복 작전을 10 여회 성공시켜 매복의 왕자, 독수리중대 그리고 주월사 소부대활동 최우수부대가 되었다.
화랑무공, 인헌무공, 월남엽송훈장을 탔던 곳이며 군 생활 중 영웅심도 느껴본 곳이기도 했다.


다음 행선지는 해병대 6대작전의 하나인 츄라이 지역짜빈동전투 현장답사였다. 그러나 짜빈동 전투지역입구에 세워진 전승비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새겨진 비문은 월맹군의 무이타이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기념비로 대체 되었다. 짜빈동 전투의 살아있는 태극무공훈장의 영웅인 당시 소대장이였던 신원배(현 재향군인회 해병대 부회장) 중위가 생각났다. 짜빈동으로부터 약30㎞ 떨어진 퀴논은 맹호부대가 위치하던 곳이다.

 

맹호부대가 큰 전공을 세운 안케패스 작전 현장을 답사했는데 638고지에 건립된 전승탑은 높고 먼 곳에 위치하기 때문인지 월맹군이 건드리지 않아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참으로 다행 이였다.


전승비에는“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이곳 안케패스 작전에서 장 렬히 산화한 맹호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란 한글 글씨가 너무 선 명했다. 퀴논으로부터 20㎞남쪽 투이호아는 내가 66년도 소대장, 부중대장을 했던 곳이다. 멀리 우리 2중대가 위치했던 216고지가 보였고 동기생 오영지 중위가 전사한 푹미 마을도 차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청룡부대가 최초 상륙했던 캄란베이는 수심이 깊어 대형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고 비행장이 위치하고 있어
구 소련이 호시탐탐 하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월남전당시는 호치민 루트 폭격과 작전부대의 근접항공지원 전투기의 굉음 소리가 요란했던 곳인데 지금은 초라한 민간 공항으로 전략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한국군 월남참전 발자취를 답사하는 과정을 모두 끝냈다. 우리가 승전국이 되고 끝까지
자유월남을 지켜주었다면 승전의 현장이 보존되어 더욱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월남 패망의 교훈


월남국민의 안보 불감증과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가패망의 씨앗을 잉태했다.
정부 요소요소와 사회각층에 침투된 간첩 그리고 불평세력의 과격한 시위로 인한 분열양상은 국가 통치력을 잃었다. 반면 월맹에는 청렴과 솔선수범의 지도력을 갖춘 호치민이라는 걸출한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어떠한 국제간의 동맹과 약속도“자국의 국익보다 우선할 수 없다”미국은 국민의 여론에 따라 월맹과는 파리 휴전협정(73.1.27)을 체결하고 월남과는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을 개입시켜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한다는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과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975년 3월 10일 월맹군이 총공세를 개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는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은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58만 명의 병력, 세계 4위의 공군력에도 불구하고 자유월남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군화가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는 거지군대에게 패했다.


자국의 국익 앞에서는 어떠한 방위 조약도 한 장의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09 해병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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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군 파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예비역 해병대령 박형건 월남의 어제와 오늘 나는 월남전에 소대장(1965), 중대장(1970)으로 두 번참전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 다시 월남 땅을 밟은 것은 37년 만이었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의 월남의...
    Date2010.05.20 Views2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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