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을 갈라놓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쪽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 김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에 이르는 248㎞( 155마일)의 길이로한반도를 가로 지르고있다.
이 군사분계선 상에 직경 8 0 0 m의 타원형 모양의 좁은 공간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에 속하는 이곳 JSA는 한국전쟁 기간중 정전회담이 개최되어 장장 2년 1 9일 동안에 무려 1 , 0 7 6회에 걸친 회합을 가진끝에 1 9 5 3년 7월 2 7일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된곳이다.
▶ 판문점의 유래
한국전쟁 당시 정전협상이 열렸던 회담장소는 현재의 위치에서 1㎞ 정도 북쪽에 있었으며, 4채의 초가집과회담장으로 쓰였던 가건물, 조립식 막사등이있었다 .
원래 판문점의 지명은‘널문리’로서 임진왜란 때는 선조 임금이 피난길에 하룻밤을 머물고 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판문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정전회담에 참석한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보게 하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店)를 한자로 적어 ‘板門店’으로표기한 것에서 유래한다.
▶ 판문점에 새겨진 애환
판문점에는 지금까지도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전해주는 상처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1 9 7 6년 8월 1 8일 오전 11시에 북한군이 저지른 소위 ‘도끼만행사건’(일명 ‘ 8 . 18 사건’)이다. 당시 유엔사측이 초소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미루나무를 자르려 하자 북한군이 이를 가로 막으며 Bonifas 대위(死後소령 진급)와 Barrett 중위를 도끼로 살해하였으며, 그 외에도 미군 4명과한국군 4명에게 중상을입혔다.
이 사건 후에 유엔사는「Paul Bunyan작전」을 수립하여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냈고, 지금은 당시의상처를그대로 안은 채나무의밑둥만 남아 있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 남측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경비부대를「캠프 보니파스」라고 명명한 것은 보니파스 대위의 넋을 기리기위함이다.
판문점 옆에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사천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을 가로질러 남측지역과 북측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불린다. 그것은 정전 직후 이곳에서 전쟁포로들의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포로들이 다리 위에서 일단 방향을 선택하면다시는 돌아갈 수없었기 때문이다
이 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북측이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8.18 사건’으로 쌍방 인원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게 되자 북측은 이 다리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새로운 다리를 구축했다. 그런데 이 다리는 7 2시간만에 놓여진 것이라 하여 유엔사측에서는 ‘ 7 2 시간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자료출처 : 한미동맹과 주한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