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이하 국유단)은 미(美)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으로부터 봉환된 유해의 신원을 고(故) 박진호 일병으로 확인하였다고 15일 밝혔다.
고인의 신원확인은 ’20년 고인의 남동생이 농·축협 업무를 보던 중에 6·25전사자의 유가족임을 알게 된 농·축협 관계자의 권유로 유전자 시료를 채취하면서 이루어졌다.
국유단은 동두천시 보건소를 통해 채취한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를 분석하여 가족관계 가능성이 있는 유해를 특정하였고, 추가검사를 진행한 결과 ’22년 6월, 6·25전사자 유해와 유가족이 서로 형제 관계임을 확인하였다. 이번 신원확인으로 2000년 4월 유해발굴이 개시된 이후 총 193명의 6·25전사자 신원이 확인되었다.
고 박진호 일병의 유해는 북한지역에서 발굴되어 미(美)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에 넘겨진 후 한국으로 봉환되었다. 고인의 유해는 1990~1994년, 미(美)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이 북한으로부터 인계받은 유해중에서 국유단이 공동으로 신원확인 과정을 거치던 중 국군전사자로 추정되어 2020년에 조국으로 봉환되었으며, 북한에서 미(美)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 하와이지부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약 15,470km의 여정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16일에 부산에서 입대한 고인은 일본 징용 경험 때문에 일본어와 영어가 가능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교육을 받은 후 미 7사단 31연대에 카투사로 배치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고인은 미 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고, 이후 부산항을 거쳐 북한 이원항에 상륙하는 원산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함경남도 장진읍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하셨다.
장진호 전투(1950.11.27.~12.11.)는 1950년 북진하던 미군과 중공군 간 전투로서 당시 미 제1해병사단(미 7사단 31연대 배속)은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되어 많은 피해를 받았으나, 적 포위와 장진호의 혹한을 극복한 성공적인 ‘돌파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8년 고양군 신당리(현재 서울 신당동)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되어 종 제작과 세공기술로 모은 돈을 꾸준히 부모님께 보내드렸고, 해방 이후에도 부산에서 같은 일을 하며 집안을 일으킨 효자였다.
고인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자 부친께서는 “일본과 객지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킨 효자였는데 가슴이 미어진다.”며 고인의 전사를 안타까워하셨고, 모친께서는 “착한 효자였는데 하늘도 무심하다.”며 가슴을 치며 한탄하시곤 했다.
고인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에 남동생 박진우 님은 “집안을 위해 희생한 형님이 북한에서 돌아가셨다니 억장이 무너지지만, 형님을 찾았다니 감개무량하고 하루라도 빨리 형님을 그리워하셨던 부모님 옆에 함께 고이 안장하여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오는 7월 19일 오후 3시 ‘동두천 국민체육센터’에서 지역 주민과 지자체 및 군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특히, 국유단은 이번 신원확인은 6·25전사자 유가족이 주변사람의 권유로 지역 보건소를 통해 유전자(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셨기에 가능하였다며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하고 있다.
친·외가 8촌 이내 가족 중 6·25전쟁에 참전하셨거나, 참전 이후 돌아오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가까운 보건소, 군부대 및 군 병원, 보훈병원 등을 방문하여 유전자 시료 채취에 참여하실 수 있고, 거동이 불편하신 경우 국유단 대표번호 1577-5625(오! 6·25)에 문의하셔서 유전자 시료 채취 방법을 안내받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