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해병 4기 여해병전우회 고순덕 회장
고순덕 해병 4기 여해병전우회장이 6·25전쟁 참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사적지 탐방 중 유관순 열사 기념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고순덕(오른쪽) 회장과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
1950년 진해 경화초등학교에 신병 기초훈련을 위해 입소한 고순덕(윗줄 맨 왼쪽) 회장 모습.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 남단 제주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제주 청년 3000여 명으로 구성된 해병 3·4기생은 1950년 9월 1일 정든 고향을 떠나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향했다. 조국 수호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여성 126명도 해병 4기로 선발된 것. 초·중학교 교사, 대학생, 여중 2·3학년생으로 구성된 이들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 해군본부에 배치돼 행정, 보급, 간호 보조, 헌병, 정훈, 통신, 교환 등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참전을 자청했던 17세 제주 소녀, 해병 4기 여해병전우회 고순덕 회장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아홉 번째 순서로 만났다. 글=노성수/사진=백승윤 기자
17세 소녀, 조국을 위해 싸우다
“내가 17살 때 얘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보행보조기에 간신히 몸을 기댄 채 기자를 맞이한 고 회장은 마치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해로 89세인 고 회장은 제주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도, 군대도 모르던 순수한 소녀는 오로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군문(軍門)을 두드렸다.
“어린 나이에 뭘 알았겠어요. 제가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소녀장사’로 불렸거든요. 그래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죠. 빼앗길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는 데 작은 힘을 보탤 수 있을 거라 확신해 주저 없이 해병대에 지원했죠.”
그렇게 고 회장은 학창시절의 꿈을 접은 채 1950년 8월 30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해병 4기로 입대했다. 이어 9월 1일 해군 수송선을 타고 제주항을 출항해 진해로 향했다. 전쟁터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던 아버지는 슬픔을 감추고, 강한 어조로 격려하며 애국심을 고취했다고 한다.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나라의 자식이다. 국가의 부름에 믿고 따르라. 이제 너는 죽어도 군인, 살아도 군인이다. 힘차게 싸워라.”
아버지의 당부를 새긴 고 회장은 9월 2일 특별중대에 소속돼 진해 경화초등학교에서 3주간 신병 기초훈련을 받았다. “여자라고 봐 주는 건 전혀 없었어요. 남자들과 똑같이, 엄격하게 훈련을 받았죠. 어찌나 훈련이 고됐던지 통통했던 볼살이 3주 만에 다 빠질 정도였어요.”
고 회장은 학창시절 사진과 홀쭉해진 신병 기초훈련 수료 당시 사진을 비교해서 보여주며 훈련의 강도를 거듭 강조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제식훈련이 익숙지 않아 혼도 많이 났지만, 강한 훈련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절도있는 동작이 몸에 배 군인 티가 제법 나더라며 웃어 보였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고향 생각이 나더군요. 친구들과 거닐던 뒷동산, 그리운 수업 시간, 엄마가 차려주시던 밥상….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죠. 하지만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도솔산지구전투 참전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는 점점 어엿한 군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해병의 일원으로 당당히 실전에 투입됐다. 강원도 양구군 동면과 해안면 경계지역에 있는 도솔산에서 벌어진 도솔산지구전투에 참전해 각종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한 것.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 1연대는 북한군 12·32사단에 타격을 입히고, 도솔산 일대 24개 고지를 모두 점령해 현재의 휴전선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같은 해병대의 전공을 치하하며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도솔산이 태백산맥에서 가장 험준한 능선에 위치해 이동하면서 아찔했던 기억이 있어요. 함께 싸웠던 전우들 이순희, 강이숙…. 지금은 다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가끔씩 꿈에서 반갑게 만나기도 하죠.”
고 회장은 지금도 매년 강원도 양구군 일대에서 열리는 도솔산지구전투 전승 행사에 참석해 그때의 빛나는 승리를 기리고 있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싸우느라 고 회장은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되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나라에서 나를 일꾼으로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뿐입니다. 저는 38살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6남매를 혼자 훌륭하게 키워냈어요. 그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바로 군대에서 배운 힘 아니겠어요? 해병대는 내가 인생의 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해준 동력입니다.”
이토록 쉼 없이 달려온 고 회장이지만, 지금은 골절 후유증으로 투병 중이다. 몇 년 전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친 후에 더욱 쇠약해졌다. 그나마 불굴의 ‘해병대 정신’으로 꾸준히 재활한 덕에 남들보다 빠르게 회복 중이라고 했다.
“함께 여 해병으로 참전했던 분들이 세상을 많이 떠나셨어요. 생존자들도 건강이 안 좋아 요양원에 계신 경우가 대부분이죠. 가장 건강한 제가 전우들을 뵈러 인사를 가곤 하는데, 해가 갈수록 몰라볼 정도로 병세가 악화돼 많아 안타깝습니다. 이분들이 떠나더라도 그들이 청춘을 바쳤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오직 나라를 위한 마음 하나로 싸운 용기 있는 소녀들이었습니다.”
글=노성수 기자 / 사진=백승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