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남들과 다르게 보이길 원한다. 머리 모양부터 다르다. 양옆을 모두 밀고 가운데만 조금 남기고는 자랑스러워한다. 이 스타일엔 이름도 있다. 상륙돌격형 머리. 여기에 팔각모를 쓰고, 군복엔 빨간 명찰 달고, 섀미로 만든 군화를 신는다. 어디서나 금방 눈에 띄는 이들은 대한민국 해병이다.
해병은 육·해·공군과 달리 모두 자원병이다. 최근 총기사고, 자살사고로 이미지가 곤두박질쳤지만 9월 입영할 1149기와 1150기 954명 모집에 2702명이 몰렸다. 경쟁률 2.83대 1. 지난해 평균 경쟁률 2.4대 1보다 훨씬 높다.
자원한다고 모두 해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훈련소에선 밥과 잠을 통제하며 모질게 다그친다. 이런 게 싫어서 집에 갈 사람은 지금 빨리 가라고. 10분 재우고 5분간 연병장 ‘뺑뺑이’를 돌리는데, 밤새도록 20번씩 하는 날도 있단다. 극한을 견디고 독기만 남아야 해병이 될 수 있다.
해병이 사는 법
해병 685기 김현진(41)씨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훈련소 동기 500여명 중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100명 이상 그 고됨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빨간 명찰을 단 건 300여명. 그는 어려서부터 선봉에 서서 싸우는, 강하고 용맹스런 이미지의 해병에 반했다고 했다. 오죽하면 부모님 반대를 걱정해 입대 전날까지 해병대 지원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입대 당일 새벽 3시에 부모님과 할머니를 깨워 큰절을 올렸다. 영문도 모르고 절을 받았던 부모는 대문까지 나와 아들의 다리를 붙잡고 만류했지만 김씨는 포항행 열차에 몸을 맡겼다. 그는 지금 아들만 셋이다. 세 아들 이름에 모두 바다 해(海)자를 넣어 해성(海成), 해창(海昌), 해강(海强)이라 했다. 다 해병대에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해병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조재련(25·1014기)씨 역시 강한 이미지의 해병을 동경해 입대했다. 김태완(34·857기)씨는 해병이 된 친구 5명의 절도 있는 모습에 자극 받아 해병이 됐다. 한나라당 홍사덕, 민주당 신학용 의원,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작가 황석영, 현기영, 영화감독 김기덕씨, 영화배우 김태평(현빈)씨가 해병이 된 동기도 비슷하다.
이런 생각으로 자원한 해병 생활, 827기 허모(35)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해병엔 ‘호봉제’가 있다. 일병 2호봉(일병 진급 2개월차), 상병 5호봉 등 계급 호봉에 따라 허락되는 행동이 정해져 있다. 이병은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화장실도 허락 받고 간다. 내무반에선 무조건 차렷 자세다. 일병 5호봉이 되면 자유시간에 전화를 쓸 수 있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을 수 있다. 사제 양말을 신을 수 있다.
일병 6호봉이면 졸병들 집합시킬 수 있다. 침상에 앉아 군화 끈을 묶을 수 있다. 복도에 있는 정수기 물을 마실 수 있다. 영내매점(PX) 출입이 가능하다(후임병을 데려갈 순 없다). 상병 5호봉이 되면 국에 밥 말아 먹을 수 있다. 내무반 TV를 켤 수 있다. 체육복 상의를 겉으로 빼서 입을 수 있다. 병장은 PX에 후임병 데리고 갈 수 있다. 내무반에서 라면 먹을 수 있다. 누울 수도 있다….”
취재 중 만난 20∼40대 해병 전역자 10여명은 모두 허씨가 전한 ‘호봉제’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제대한 해병 1074기 강정민(22)씨도 이 ‘전통’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 했다.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기수열외’. 부대원들이 집단으로 한 병사를 ‘왕따’시키는 이 악습을 조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수열외의 원래 의미는 작업장 등에서 일할 때 막내는 열외시킨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막내가 아직 부대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눈으로 보고 배우라는 뜻이었다. 신참의 군대 적응을 도와주려고 시작된 관행이 누군가를 왕따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경북 포항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전역한 A씨(22)도 “구타 근절을 위해 수많은 교육이 실시됐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구타가 사라진 적은 없다. 이유도 없이 맞을 때는 정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취재 중 만난 해병 전역자 중 “군대에서 맞지 않았다”고 말한 이는 없었다.
악습만 있는 건 아니다. 백령도나 연평도 해병이 휴가를 나갈 때면 선임병들이 후임병의 군복을 다려주고 군화를 챙겨준다. 휴가 나가서 맛있는 것 많이 먹으라는 뜻으로 휴가 전날엔 식사량까지 조절해준다. 김태완씨는 “육지로 휴가 나가는 걸 해병들은 ‘상륙한다’고 표현한다. 내가 상륙할 때마다 선임병들이 정말 세세히 챙겨줬다. 그래선지 제대 후에도 계속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제대하는 해병들의 마지막 ‘행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벌어진다. 요즘도 소속 부대에서 전역식을 마친 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가서 전역병들이 단체로 경례하며 마지막 전역 신고를 한다. 강정민씨는 “이순신 장군께 전역 신고를 해야 제대 절차가 진정 마무리되는 것이 해병의 전통”이라고 했다.
해병대가 사는 법
한국은 미국(17만5000명)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의 해병대를 갖고 있다. 별 셋인 해병대사령관을 포함해 장교 2000명(장군 15명), 부사관 5000명, 사병 1만9800명 등 2만6800명이나 된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 상륙지원단, 교육훈련단, 연평부대 등이 있다. 이는 영국(7200명), 스페인(8900명), 대만(1만5000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해병대의 역할과 임무는 국군조직법에 명시돼 있다. 부대의 임무를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로 정한 것은 해병대가 유일하다. 그만큼 군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높다는 얘기.
하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해군 산하로 편제됐던 국군조직법이 1973년 개정될 때 해병대 존재 근거가 사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유신 시절 엄혹한 분위기에서 해병대가 ‘딴 마음’ 먹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란 해석도 있었다. 1990년에야 해병대의 법적 근거가 다시 살아났지만 육군과 해군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희상 전 청와대 국방보좌관은 “해병대는 존재감만으로 대북 억지력을 갖고 있다. 북한이 해안 방어에 8개 사단이나 배치한 건 우리에게 해병대 2개 사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략적 중요성에도 실제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지난해 국방부 예산 29조5627억원 중 해병대 예산은 7339억원. 전체의 2.5%다. 그나마도 대부분 인건비인 경상운영비가 6270억원이고 전투력 증강에 쓰인 건 1069억원에 불과했다. 이는 공군 전투기 F-15K 한 대 값이다. 올해 전투력 증강 예산이 1902억원으로 늘고 해병대 인사·예산권이 독립된 건 연평도 피격 사건 ‘덕’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안보 파트에서 근무했던 인사는 “서북도서 지역의 해병대 전력이 유사시 대규모로 북한 상륙작전을 감행할 능력이 되는지 대단히 회의적”이라며 “그만큼 형편없는 지원 속에서 해병대라는 이름으로 강한 군기와 훈련을 통해 전투력 약화를 대체해온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총기사고, 자살사고가 잇따른 해병 2사단은 구조적 문제가 있다. 2사단 방어영역인 김포와 섬들의 해안선을 펼쳐보면 일반 육군 사단의 2배 이상이다. 빈약한 지원에 관리해야 할 소초도 너무 많다. 그래서 더 강한 군기, 더 강한 통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과중한 경계 임무는 해병대 본연의 임무인 기동작전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나 해병대는 강한 군기를 갖고 있지만, 대한민국 해병대는 육·해·공군의 틈바구니에서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빈약한 지원을 해병정신 ‘악으로 깡으로’ 보완해가며 더 강도 높은 복무 관행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해병전우회가 사는 법
이렇게 힘든 해병 생활을 마치고도 그들은 다시 ‘해병전우회’란 깃발 아래로 모여든다. 호남향우회, 고대교우회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인맥’이라는 친목단체.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재활치료사로 일하는 김태완씨는 2004년 귀갓길에 우연히 해병전우회 마크가 붙은 버스를 발견했다. 나이 지긋한 선배 해병들이 밤늦게 동네를 순찰하며 방범활동을 하는 모습에 그는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동참했다. 요즘도 매주 금요일 저녁 9시면 인천 남동구 해병전우회원들과 함께 여고생들 귀갓길을 살펴준다.
대학생인 조재련씨도 교내 해병전우회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충남 아산시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장내 정리를 도왔다. 그는 “해병전우회원들이 빨간 모자 쓰고 설치는 거 보면 나도 거부감이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자원봉사에서 사회에 기여하려는 진정성을 느껴 동참했다”고 말했다.
강정민씨는 아예 해병전우회에서 활동하다 직장을 얻었다. 매주 3차례 밤마다 여고 주변 순찰에 열심히 참여했더니 눈여겨 본 전우회 선배가 건설회사 취업을 주선했다. 해병전우회만의 독특한 단결력. 한 안보전문가는 이렇게 해석했다.
“해병 지원자는 대체로 애국주의와 마초이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이 전우회에서 다시 모이는 것은 그들만이 가졌던 혹독한 훈련의 기억을 공유하며 동질성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글=이제훈 기자, 사진=홍해인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