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6월 8일 새벽이었습니다. 도솔산 정상 공격을 위해 매복 중이던 아군 머리 위로 소련제 수류탄 수십 발이 hbcom_3344.jpg날아왔습니다. 아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수류탄 4발을 들고 적군 진지를 향해 30~40m를 기어올랐습니다. 놀란 소대원들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수류탄을 뽑아 든 적을 향해 먼저 수류탄을 던져 넣었습니다.”

이날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예비역 대령 이근식(80)씨가 지난 4일 강원 양구의 도솔산지구전투위령비 앞에서 옛 기억을 더듬었다. 59년 전 소위 계급장을 달고 도솔산 전투에 투입되던 바로 그날이었다. 전적지 답사교육에 나선 해병대 초급장교들의 노병의 증언에 눈이 반짝였다. 미 해병대와 임무교대한 아군 해병대 제1연대는 17일간의 혈전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을 점령했다. 해병대를 상징하는 ‘무적해병’이라는 말은 이때 생겨났다.

도솔산(1148m)은 펀치볼로 불리는 해안분지를 둘러싼 험준한 산봉우리 중 하나. 1년 전 양구 동면과 해안면을 연결하는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고 구불구불한 돌산령(1000m)을 넘어야 했다. 돌산령 위령비에서 해병대도솔산지구전적비가 위치한 도솔산 정상까지는 약 1㎞.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야생화가 만발한 산길을 오르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도솔산 능선이 해안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바라만 보아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이 산을 차지하기 위해 남북의 젊은이 4000여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하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른 아침 인적 드문 돌산령을 넘어 대암샘터에 다가가는 순간 노루 한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암샘터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로 목을 축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인기척이 나자 큰 눈망울로 힐끗 쳐다보더니 껑충껑충 뛰어 지뢰 표시가 달린 철조망을 넘어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대암샘터 주변은 해안분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동서 3.5㎞ 길이의 타원형인 해안분지는 양구 최북단에 위치한 특이한 지형으로 펀치볼(Punch Boul)로 더 유명하다. 한국전쟁을 취재하던 외국 종군기자가 차별침식으로 생긴 분지에 운해가 떠 있는 풍경을 보고 칵테일의 일종인 펀치를 담는 그릇과 비슷하다고 펀치볼로 이름 지었다. 기온차가 큰 가을 아침에는 해안분지를 뒤덮은 운해의 장관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hbcom_3345.jpg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해안분지에 들어서면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을지전망대 아래에 위치한 제4땅굴은 1990년 군사분계선과 1.2㎞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 전동차를 타고 암흑의 공간에 들어서자 ‘오직 혁명을 위하여’ 등 북한군이 암벽에 써놓은 구호가 선명하다.

해안면 소재지에서 가칠봉 능선에 위치한 을지전망대(1049m)로 오르는 군사도로는 풍광이 아름다워 자주 길을 멈추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을지전망대는 남쪽의 해안분지와 북쪽의 산을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전망창 너머로 늘 운해가 낀다는 운봉과 북한 여군들이 목욕을 한다는 선녀폭포, 그리고 금강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가칠봉은 금강산 1만2000봉을 완성하는 남쪽의 마지막 봉우리. 한국전쟁 때 이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40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행히 국군이 가칠봉을 점령하면서 휴전선이 38선 북쪽으로 획정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천안함 사건으로 휴전선을 둘러싸고 남북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지만 산하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가칠봉(1242m)과 대우산(1178m), 도솔산(1148m), 대암산(1304m) 능선에 둘러싸인 해안분지는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긴 듯 평온하고, 휴전선 너머에서는 북한군들이 화전을 일구기 위해 산을 태우는 파르스름한 연기가 마치 포연처럼 피어오른다.
내금강에서 발원한 수입천은 분단 이후 민간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계곡. 수입천과 나란히 달리는 구 31번 국도는 분단 직전까지 내금강으로 가던 유일한 통로로 몇 해 전 ‘두타연 생태 트레킹’ 코스로 개방됐다.
방산 초소에서 민통선 철문을 통과해 포연처럼 하얀 먼지를 꼬리에 달고 비포장도로를 5㎞쯤 달리면 국내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인 두타연. 반세기를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남아있다 개방된 두타연은 직경 7.2m에 수심 20m인 소(沼). 두타연 옆에는 보덕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고, 원시림을 달려온 수입천은 통일을 염원하듯 바위 틈에서 한반도 지도를 닮은 와폭을 연출한다.

두타연에서 구 31번 국도를 5㎞쯤 달려 하야교를 건너면 상수도 취수장이 위치한 삼거리가 나온다. 내금강 가는 길목으로 대우산 줄기가 병풍처럼 막아서고 봉우리엔 남방한계선의 GOP가 보인다. 이곳에서 금강산 장안사까지는 백리도 안 되는 35㎞.

내금강 가는 길목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1.6㎞를 더 오르면 수입천 지류를 가로지르는 비아교를 만난다. 비아교에서 비득재까지 이어지는 ‘피의 능선’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전사한 두밀령 전투가 있었던 곳. 이곳의 계곡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다는 두밀령 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혈전으로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이 온통 핏빛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진을 쳤다는 진고개를 넘고 여름에는 산사태, 겨울에는 눈사태가 난다는 사태리를 지나 숨 가쁘게 산을 오르면 ‘단장의 능선’ 전투가 벌어졌던 931고지. 미2사단과 프랑스대대 등이 한 달 동안 전투를 벌였던 단장의 능선은 4㎞ 남짓. 외국 종군기자가 한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명명했다.
벙커를 리모델링해 지난달 개관한 931고지 전시관에는 프랑스대대를 이끌고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스스로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으로 강등한 2차대전 영웅 몽클라르 대대장의 말이 패널로 전시되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양구=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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