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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이사장이 펴낸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이 책은 <제주 걷기 여행>에 이은 제주올레 이야기 후속편이다.
ⓒ 북하우스
서명숙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다. 제주올레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면 다른 책을 봐야 한다. 에세이도 아니다. 제주올레 감상문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봐야 한다. 사람 얘기다. 제주올레를 만들었던 사람들, 올레길을 걸었던 올레꾼들이 주인공이다.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이 펴낸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북하우스)은, 그가 올레의 진정한 주인들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느낌이 든다.

 

제주올레가 서명숙 개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제주올레가 그저 길바닥에 그려진 파란색 화살표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제주올레를 한 번이라도 걸어봤던 사람은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아직 걷지는 못했지만, 제주올레를 걸어보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짐작하겠지만, 제주올레는 서명숙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저 방향 표시의 화살표만도 아니다. 그 속에는 사람이 있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직장 선배였던 서명숙 이사장의 꾐에 빠져 제주에 붙박이가 된 안은주 사무국장. 남편은 서울에, 초등학생인 외동딸은 인도에, 본인은 제주에 산다. 그녀는 왜 그런 꾐에 빠졌을까? 안은주 국장의 취재원이었던 김민정 홍보팀장과, 안 국장의 대학 선배였던 보석 디자이너 이수진 디자인실장은 어떻게 '대포동 4인방'에 합류해 ㈔제주올레에 똬리를 틀게 되었을까? 그 속에는 끌림이 있다.

 

제주올레 초기 역사를 만들었던 '대포동 4인방'

 

지금은 희귀본이 되어버린 1코스 브로셔를 만든 김경수 화백. 날카로운 필치로 수백 장 분량의 원고보다 더 강한 펀치의 시사만평을 그리던 그가 왜 제주올레 홍보 브로셔를 만들게 됐을까? 김 화백은 최근 <좌충우돌 제주올레>(시사인북)이라는 명랑여행만화 1편을 펴냈고, 현재 후속편을 준비 중이다. 누가 그의 코를 꿴 것일까? 그 속에는 인연이 있다.

 

제주도 서귀포 일대를 주름잡던 조폭 '땅벌파'의 두목이었던 서동철 초기 탐사국장. 형의 뒤를 이어 제주올레 길을 개척했던 서동성 탐사국장. 그는 시국사건에 연루된 누나와 폭력사건에 연루된 형이 모두 '빵잡이'가 됐던 집안의 막내였다. 지금의 제주올레 루트를 온몸으로 개척해냈던 전·현직 탐사국장이 형제였던 건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그 속에는 혈연이 있다.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제주올레를 만들었던 이수진 디자인실장(왼쪽)과 안은주 사무국장. 그들은 서 이사장, 김민정 홍보팀장과 함께 '대포동 4인방'이었다. 지난해 4월 25일 4코스를 거꾸로 걸었던 '클린올레' 행사 출발지에 선 두 사람.
ⓒ 이한기
제주올레

"전진할 수 없는 구간에 뗏목이나 징검다리를 놓고, 울퉁불퉁한 돌멩이를 평평하게 고르고, 토사가 쓸려나가지 않게 잔디로 뗏장을 입히고, 말과 소떼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장문을 해달아야 비로소 하나의 길이 되는", 그래서 "이들의 수고로운 손과 발, 굵은 땀방울이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오늘 걷는 올레길은 없었을 것"이라는 7인의 올레 탐사대.

 

'올레길의 날다람쥐' 김홍석 대원, '올레 보수반장' 김인석 대원, '올레 제작소장' 고희경 대원, '돌만지기의 달인' 고혁준 대원, '올레길의 수호천사' 송수호 대원, '올레의 전설이 되어버린' 김수봉 대원, '4차원 막내' 송동훈 대원 등이 서동성 국장과 고락을 함께하는 탐사대 7인방이다. 그 속에는 지연이 있다.

 

'바당올레'라고 불리는 올레 8코스. 제주도 남쪽 월평마을에서 시작해 대평포구에서 끝나는 16.3km 구간이다. 난이도는 상. "바다에 밀려 내려온 용암이 굳으면서 절경을 빚은 주상절리와 흐드러진 억새가 일품인 열리 해안길"을 지나는 이 코스에는 해병대길이 있다. 해녀들만 다니던 거친 바윗길을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평평하게 고른 덕분에 해병대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제주도 북쪽 13코스에는 민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길을 만들어준 특전사 숲길이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해병과 하늘에서 내려온 특전사가 제주올레 길을 내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전투를 벌인 군인들이다.

 

해병대와 특전사 장병들이 벌인 가장 아름다운 전투

 

지난해 4월말 '클린올레' 행사에 참석해 4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내겐 첫 올레길이었다. "희망이란 /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노신의 글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가 생각났다. 올레의 첫 느낌은 '길의 재발견'이었다. 없던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던 길도 아니었다.

 

그 올레길을 '바람의 딸' 한비야가 걸었고,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도 8코스 대포포구 근처 조용한 펜션에 머물며 썼다. 우리 문학사의 큰 획을 그은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선생, 시대의 스승 리영희 선생, 여성학의 대모 이이효재 선생 등이 제주의 자연에 탄복하며 올레꾼이 되었다. 많은 기업의 CEO들도 제주올레 길 위에서는 한 명의 올레꾼이었다. 일부는 '1사 1올레' 운동에 동참하며 좋은 인연을 맺어나가고 있다.

 

  
지난해 4월말 '클린올레'의 종착점인 표선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미역귀'를 채취한 오토바이 아저씨를 만났다.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올레꾼 일행은 짭조름한 미역귀를 하나씩 얻어 바다내음을 몸 안에 저장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명숙 이사장, 맨 오른쪽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다.
ⓒ 이한기
제주올레

 

십수년 동안 나눴던 이야기보다 제주올레 일주일 동안 나웠던 이야기가 더 많았다는 어느 부자(父子)의 이야기, 이별여행으로 왔던 올레였는데 재결합여행이 돼버린 젊은 커플,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만 마음은 텅 비어 있던 차에 올레를 경험하고 제주 이민을 준비하고 실행한 사람들, 한 번 발을 잘못 들여놔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다시 찾아올 준비를 하는 올레 중독자들…. 지난 3년 동안 서명숙 이사장이 제주올레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 가운데 일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정치부 여기자 1세대. <시사저널> 편집장과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내며 언론계에 23년 동안 몸담았던 서명숙이 '글쟁이'에서 '길쟁이'가 된 사연 2편이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에 담겨 있다. 1편은 제주올레 영감을 얻은 산티아고 걷기 여행과 제주올레 초기 코스에 대해 썼던,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는 부제를 단 <제주 걷기 여행>(2008)이다.

 

3827자. 873개 낱말. 12개 문답. 200자 원고지 25매. A4 용지 4장. 2007년 8월말 '제주올레'를 알리는 첫 보도자료가 언론사에 뿌려졌다. 당시에는 이 문서가 대한민국 걷기 여행의 역사를 충격적으로 바꿔놓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올레는 걷기 여행의 고유 대명사가 되고도 남을 만큼 뿌리를 내렸다.

 

걸은 만큼 제주도가 보이고, 머무른 만큼 제주도가 보인다

 

이 보도자료의 첫 번째 문항,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탄생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계자연유산의 섬, 제주도는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그 기막힌 아름다움에 반하는 섬이다.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음미하면서 느린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주도의 길은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그러나 차를 타고 훌쩍 둘러보고 가는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쉽게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걸은 만큼 제주도가 보인다. 또한 머무른 만큼 제주도가 보인다."

 

'간세다리(게으름)'와 '꼬닥꼬닥(천천히)'은 제주올레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서명숙 이사장이 3년 전 "조금이라도 느리게 음미하는 길을 걷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욕망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한 점에 비쳐볼 때 '느림'은 제주올레가 추구하는 가치를 대변해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느림의 정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제주올레 길을 만드는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토목공화국에서 '안티 공구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3년 전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광치기해변까지 걷는 15km의 길로 시작한 제주올레는 지난 6월말 개장한 추자도 올레까지 포함해 21개 코스, 340여km의 길로 급성장했다. 양적 성장만은 아니다. 몇 코스가 더 생겨나면 제주는 콘크리트 해안 일주도로를 드라이브하던 관광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길을 걸으며 일주할 수 있게 된다. 점으로 시작해 선과 원으로 변한 제주올레 길. 제주의 지도가 바뀌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 마음의 지도도 바뀌고 있다. 변화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지난해 5월 23일 우도올레 길이 열렸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다. 다음날인 5월 24일 우도봉에서 내려다본 우도. 바다 건너 저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
ⓒ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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