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다.” / 경향신문 배문규기자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1943년 여름. 18살 미국 흑인 청년 조지프 스미스는 보스턴 모병소에서 해병 입대를 지원했다. 모병관은 무척 힘든 훈련이 될 거라고 말했다. 훈련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패리스아일랜드라고 했던가. 백인 지원자들과 같은 훈련을 받는다고 했다. 들뜬 생각을 좇는 사이 기차는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앞서 가는 백인 지원자의 뒤를 따라가는데, 인솔자가 물었다. “넌 어디로 가는 거지?” 인솔자를 따라가자 흑인들을 위한 목탄 열차가 있었다. 바깥은 불볕처럼 더운 날씨였다. 기차 안은 찜통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라도 들어올까 싶어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재와 먼지만 들어왔다. 이들이 탄 기차는 앞서 간 백인들과 달리 노스캐롤라이나주 잭슨빌 근처 캠프 리준의 ‘몽포드 포인트’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흑인 해병들 앞에 펼쳐진 것은 숲이었다. 애초부터 흑인을 위해 준비된 훈련소는 없었다. 직접 5.5에이커(약 7000평)의 터를 정리해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한여름 숲속에는 곰과 방울뱀, 악어가 득시글했다. 습한 대기에는 모기가 들끓었다. 이곳, 오직 흑인만을 격리 수용한 몽포드 포인트에서 1942년부터 1949년까지 ‘몽포드 포인트 마린’ 2만여명이 배출됐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까지 참전해 미국 해병으로 싸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이 전역을 택했다. 인종차별이라는 벽 앞에 절망한 이들이 군대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츰 잊혀져 갔다.


▲ 1942년 전황 급박해지자 입대 허용
   적뿐 아니라 자국 인종차별과 싸워
   종전 뒤 대부분 전역 ‘울분의 세월’

▲ 아흔살 안팎 돼서야 ‘의회 시민훈장’
   생존 노병들 “마침내 해병이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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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4월 미국 흑인 해병을 분리수용한 노스캐롤라이나주 몽포드포인트 훈련소에서 흑인 상병(오른쪽)이 M1 개런드 소총을 든 훈련병에게 격투기를 가르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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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중대 349소대원들의 기념촬영 모습.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자료

 

세월이 흘러 차별 대우에 울분을 삼키던 흑인 청년은 87살 노인이 됐다. 그 사이 세상은 변했다. 스미스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어바나샴페인캠퍼스에서 학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이때껏 “해병 출신이라 자랑스럽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자신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스미스는 몽포드 마린 생존자 400여명과 함께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 모였다. 일부는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올랐다. 몇몇은 휠체어에 탄 채 젊은 해병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다. 탄력 넘치는 몸으로 태평양의 정글을 누비던 어제의 용사들은 이제 아흔 살 안팎의 노인이 됐다. 이들은 지난달 27일 미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 시민훈장인 ‘의회 금메달’을 받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해병 ‘몽포드 마린’이 탄생한 지 70년 만의 명예회복이었다. 유에스에이투데이는 이날 미 해병대 236년 역사에서 어두운 인종차별의 기억인 첫 흑인 해병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빛을 보게 됐다고 보도했다. 남색 해병 제복을 입은 스미스는 유에스에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마침내, 빌어먹을 해병이 됐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미국 해병대는 한국 해병대가 사용하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의 원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악마의 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용맹을 자랑했다. 하지만 비뚤어진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미국의 각 군 가운데 해병대는 가장 늦게 흑인의 복무를 허용했다.

흑인 해병의 탄생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시작되자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연합국에 대한 원조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은 사람이 죽는 전쟁 덕분에 활력을 찾았다. 모두 방위산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도, 수백만개의 일자리로부터도 소외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흑인이다.

 

1941년 6월 흑인 민권운동가 필립 랜돌프를 비롯한 수만명의 시위대가 수도 워싱턴 DC로 몰려들었다. 참전 혹은 반전을 주장하는 무리가 아니었다. 국가 방위산업에서의 흑인 노동자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시가행진을 하루 앞둔 6월25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통령 행정명령 8802호’에 서명했다. “정부 기관과 연방 사업자들은 국가 방위사업에서 인종, 종교, 국적에 따른 고용 차별을 할 수 없다.” 미국 흑인들을 위해 내려진 최초의 대통령 지시였다. 그러나 사실은 군수품 생산 수요를 뒷받침하고, 참전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 내린 조치였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다음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1942년 6월1일. 미국 사상 처음으로 흑인 해병 모집이 시작됐다. 수천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선발자들은 백인 해병들과는 분리돼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잭슨빌로 보내졌다. “만일 백인 해병 5000명과 검둥이 해병 25만명 가운데 어느 쪽을 지휘할지 질문받는다면 백인 부대를 택하겠다.” 1941년 군내 흑인 고용 차별 금지 명령이 내려지자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던 토머스 홀컴 소장이 한 말이다.

흑인 해병들은 입소하자마자 군복색이 자신의 피부색을 덮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해병대는 상륙전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흑인 해병들에게는 백인 해병들을 위한 군수지원 업무만 맡겨졌다. 이들은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 빼곤 뭐든지 할 수 있던 백인 교관들의 가혹행위도 견뎌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부분은 전장에서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일반 시민들에 의한 차별이었다. 당시 미국 남부에는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차별을 규정한 ‘짐 크로 법’이 남아 있었다. 흑인 해병들은 미국 남부와 북부의 경계인 ‘메이슨 딕슨선(펜실베이니아·메릴랜드주의 경계선으로 미국 북부와 남부를 나누는 상징적인 선)’을 지나면 좌석에서 일어나 기관차 뒤편에서 잭슨빌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도 흑인은 아무 영화관이나 레스토랑에 갈 수 없었다. 심지어 ‘군인 환영’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군인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음식을 대접하던 적십자조차 흑인 병사를 태운 기차가 지나가면 문을 걸어 잠궜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 피부색은 무의미했다. 흑인 해병들은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팔라우나 이오지마에서 물과, 식량 그리고 탄약을 날랐다. 하지만 머리 위로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정글과 모래사장을 기어가다보면 전투병과의 차이가 무의미해졌다. 앞에서 백인 해병이 쓰러지면 그의 총을 받아 대신 갈겼다. 전쟁이 격해지면서 피부색의 차이는 사라졌다. 흑인과 백인 해병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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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아모스 대장(왼쪽)이 지난달 27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의회 금메달’ 수여식에서 몽포드포인트 마린 생존자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워싱턴DC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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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포드포인트 마린 생존자 400여명은 젊은 시절 모습이 담겨진 의회 금메달을 받았다. 워싱턴DC | AP연합뉴스

 

1948년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군내 인종차별을 금지한 ‘대통령 행정명령 9981호’에 서명했다. 이로써 1949년 흑인들도 몽포드포인트가 아닌 패리스아일랜드에서 백인들과 함께 해병 훈련을 받게 됐다. 한국전쟁 동안 외형적으로는 각 군내 부대의 인종 통합도 이뤄졌다. 하지만 몽포드포인트에서 배출된 최초의 흑인 해병 몽포드 마린들은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이 군을 떠나면서 명예를 인정받을 기회를 놓쳤다. 미군 내에는 몽포드 마린 외에도 흑인으로만 이뤄진 부대가 더 있었다. 미군 내 첫 흑인 부대의 역사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2년 여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북부군은 남부군에 잇단 참패를 당하며 수세에 몰린다. 이에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발효된 역사적 ‘노예해방 선언’을 1862년 9월에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흑인 노예들의 해방과 연방 군대 참여를 보장하면서 남부의 많은 흑인들이 북부로 이탈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인 ‘버팔로 솔저’ 기병대가 탄생했다. 이들은 19세기 후반 미국 인디언들과의 전투로 유명해졌으며, 부대원들은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의 훈장’을 받았다. 공군에는 ‘터스키기 에어맨’이 있었다.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육군항공학교에서 교육받은 조종사 994명과 지상요원 등 1만6000여명의 흑인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 공군 제332 비행단과 제477 폭격비행단 소속으로 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몽포드 마린보다 앞선 2007년 3월 ‘의회 금메달’을 수훈하면서 늦게나마 존재를 인정받았다.

몽포드 마린의 명예회복은 미국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아모스 대장의 공이 컸다. 그는 지난해 8월 의회에서 몽포드 마린에 대한 훈장 수여를 요청했다. 그 뒤 초당적 협력 끝에 만장일치로 법안이 통과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최종 승인됐다. 아모스 사령관은 당시 생존자 모임에 참석해 “지난날 바다 건너 적군뿐 아니라 자국의 인종차별과도 맞서 싸운 사나이들의 역사를 일반 해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모든 미국 해병 교육과정에는 ‘불편한 진실’인 몽포드 마린의 역사가 포함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72130395&code=9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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