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미국 수병과 해병대 사진
1871년 6월, 미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 해병대원과 수병들이 강화도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원판은 현재 미국 해군역사센터(U.S. NAVAL HISTORICAL CENTER)에 소장되어 있다.
19세기 중반 대(對)아시아 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침략해왔다. 1871년 5월 16일,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여 19일에 남양만에 도착한 후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에 정박하였다. 이후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이에 조선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으며, 미군이 이에 불응하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이를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이후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대원군의 단호한 쇄국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쟁으로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강화도 철수 시 수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군기(軍旗) 50개, 대포 및 소총 481문을 전리품으로 약탈한 후 철수하였다.
[자료출처 : 국가문화유산 종합정보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