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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일거에 포위격멸…대반격작전으로 전환

 

낙동강전선에서 국가존망이 달린 백척간두의 위기를 넘긴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을 일거에 포위격멸 및 구축할 전략목표하에 전쟁 초기부터 대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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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유엔군사령관(원수)이 미 해군 상륙지휘함 마운트 맥킨리 호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미 육군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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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병대가 1950년 9월 15일 적색해안으로 명명된 상륙목표지점으로 상륙하고 있다. (자료사진)
 
인천상륙작전은 전쟁 발발 일주일도 안된 7월 첫 주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 의해 연구됐으며,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이름 아래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 등 3개 안을 작성해 그 개략계획을 미 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모부에 회람했고, 이 중에서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 인천상륙작전 세부계획을 완성해 관련부대에 하달했다.

■ 상륙지역 논쟁과 결정

맥아더 장군이 계획을 발전시키는 동안 미 합동참모본부는 적 후방에 상륙하겠다는 상륙작전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

미 합동참모본부가 반대한 핵심은 인천지역이 조수·수로·해안 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제한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륙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협소한 단일수로로서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적이 수로에 기뢰를 부설할 경우 많은 피해가 예상됐다.
또한 인천해안의 간·만조 차는 10m 내외로 간조시 해안에는 2~5km의 광대한 갯벌지대가 형성돼 상륙주정 및 상륙함의 접안이 곤란했다.

이와 같이 상륙지역에 대한 의견대립이 계속되자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미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상륙지역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됐다. 여기서 맥아더는 1950년 8월 23일 오후 극동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인천상륙작전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맥아더는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하려는 이유에 대해 “적은 그의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돼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모두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정치적·심리적 이유를 들어 서울을 신속히 탈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 그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인천은 8군이라는 ‘망치’가 인민군을 분쇄하는 데 10군단은 ‘모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미 합동참모본부는 결국 8월 28일에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했으며,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D일)로 확정했다.

■ 기동부대 작전계획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7합동상륙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제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 합동기동상륙부대는 90공격기동부대, 92기동부대를 포함해 임무별로 모두 7개 기동부대로 편성됐다.

90공격기동부대는 상륙군 부대를 수송하고 해안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상륙군 부대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며, 상륙작전에 따른 해·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함포지원을 통제하는 등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92기동부대는 상륙군부대인 10군단으로 이뤄진 기동조직으로서 상륙이 완료될 때까지 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지휘를 받았다.

이 7합동상륙기동부대는 미 해군 함정을 비롯해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프랑스·네덜란드 등 총 260여 척의 함정으로 편성됐으며 한국해군에서도 초계함(PC) 4척과 소해정(YMS) 7척 등이 참전했다.

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작전명령은 9월 3일 하달됐는데, 이 계획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7합동상륙기동부대 기함(로체스터 호)의 통제 하에 해병사단 항공기, 미 공군기, 영국 공군기가 항공모함에서 최대의 항공지원을 제공한다. 상륙장소로부터 48km의 지역을 합동기동부대의 목표지역으로 한다.
해상작전단계에서 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지휘소는 로체스터 호, 도일 제독(90공격기동부대장)의 지휘소는 마운트 맥킨리(Mount McKinley) 호에 둔다.
상륙해안은 월미도 북단, 인천북단 해안벽 지역, 인천남단 갯벌지역 등 3곳을 선정하고 이를 순서대로 녹색해안, 적색해안, 청색해안으로 명명한다. 상륙시간은 9월 15일 아침 만조시간 오전 6시 30분을 L시, 오후 만조시간 오후 5시30분을 H시로 한다.”

■ 경인지역의 적 상황

10군단의 정보판단에 의하면 8월 말 인민군은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낙동강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고, 서울을 비롯한 후방지역에는 지역경비부대와 병참선 경비부대 그리고 훈련이 미숙한 신편부대가 산재해 있었다.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북한군 226독립육전연대 3대대 소속의 400여 명과 918해안포연대 예하부대가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인천시가지에는 신편 9사단 예하 87연대(연대장 대좌 김태모)가 8월 12일부터 인천지역 방어 임무를 인수해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인천시가지 중 월미도 제방으로부터 북동쪽 주안염전까지 5~6km의 해안방어는 884군부대 예하 1개 대대가 배치돼 방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판단을 고려할 때 인천지역의 적 병력 규모는 지역경비부대를 포함해 20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지역에서 경계 중이던 제9사단은 8월 12일에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했으며, 18사단도 9월 중순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서울을 출발,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지역의 적 병력은 김포지역의 500명을 포함해 약 5500명이었다. 그 밖에 9월 4일까지 추가로 증원된 2500여 명을 합하면 서울-인천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총 병력은 1만여 명으로 판단됐다.

■ 인천으로 항진

인천상륙 일자가 다가오자 7합동상륙기동부대는 9월 초에 부산, 일본의 사세보·고베·요코하마에서 상륙군 적재를 시작해 9월 10일부터 인천으로 출항하기 시작했다.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은 각각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에 출항했으며, 도중에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제1해병연대와 국군 17연대 등과 합류했다.
7합동상륙기동부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은 기함 로체스터 호로 9월 12일 사세보에서 출항했고, 맥아더 장군은 90공격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해군소장의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 호에 승선해 이날 밤 사세보 항을 출항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첩보활동도 쉴 새 없이 이뤄졌다. 해군 총참모장의 지시를 받아 함명수 소령(당시 해군본부 정보국장)을 지휘관으로 17명의 첩보대를 구성하고, 켈로(KLO) 일행과 함께 8월 18일 부산에서 출항해 영흥도로 이동했다.

이들은 8월 24일 영흥도 십리포에 상륙해 인근에 위치한 영흥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인천지역 북한군 병력 및 포진지, 보급로, 기뢰부설현황, 상륙지점의 지형과 안벽의 높이 등을 파악하는 등 적극적인 첩보수집활동을 실시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9월 1일 영흥도에 상륙한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의 클라크(Eugene F Clark) 해군대위를 통해 맥아더사령부로 송신하게 됐는데, 그 이유는 미군 첩보대는 맥아더사령부에 직접적으로 송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감행됐는데, 9월 12일 한·미·영 혼성부대가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했고, 동해안에서는 9월 14, 15일 삼척 일대에 맹렬한 폭격을 가했는가 하면 경북 영덕 남쪽 장사동에서는 이명흠 대위가 지휘하는 독립유격 1대대의 학도병이 9월 15일 새벽 해안에 실제 상륙했다.

그러나 이들은 태풍 케지아(Kezia)의 영향으로 상륙함(LST)이 좌초됨으로써 기습이 노출돼 적과 교전을 벌여가며 해안 근처의 고지를 탈취하고 저항하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 월미도 점령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에 시작됐다. 이날 새벽은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날씨였다.
새벽 5시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어둑어둑한 새벽 하늘로 날아 올라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렬한 공중폭격을 실시하고, 그 뒤를 이어 구축함의 첫 포탄이 월미도에 작렬했고, 로켓포함이 녹색해안과 그 주변의 적 진지에 대해 1000여 발의 포탄을 퍼붓는 동안 미 5해병연대 3대대 상륙단은 상륙주정(LCVP) 7척에 분승해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했다.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2분 전 모든 포격은 일시에 중지되고 주정로(舟艇路)를 따라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돌격파(突擊派)들 머리 위로 미 해병항공기들이 날아가 제1파의 바로 전방 해안에 폭탄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G중대와 H중대의 소대들이 탑승한 제1파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적 해안에 예정보다 3분이 늦은 오전 6시33분에 상륙했다.

G중대는 월미도 정상의 105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H중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의 출구에 도달해 그 일대를 차단했다. 2개의 돌격중대가 목표를 공격하는 동안 10대의 전차로 구성된 제3파가 해안에 도착했다.

오전 6시50분 상륙한 대대장 태플리트(Robert D. Taplett) 중령은 약 5분 뒤에 G중대 선두인 3소대가 105고지 정상에 도달, 성조기를 게양했다는 무전보고를 받았다. 오전 8시에는 월미도를 확보하고 섬 전반에 걸친 소탕작전은 정오쯤 완료했다. 월미도 상륙작전시 미 해병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뿐이었다. 반면 5해병연대 3대대는 적 108명을 사살했고, 136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 시가지 소탕작전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은 국군 1해병연대가 담당했다. 오후 만조시간에 적색해안에 상륙한 해병대는 9월 16일 아침 인천시가지 중안을 통과하는 경인선 철도를 기준으로 남쪽지역은 3대대가, 북쪽지역은 1대대가 분담해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3대대가 담당한 지역은 응봉산 일대와 시가중심지였다. 상륙작전시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살아남은 적은 대부분 인천지역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도주의 기회를 놓친 상당수가 민간인으로 변장해 주택가에 숨어 있었다.

이들은 소탕작전 중 많은 수가 애국시민의 신고로 생포됐으며, 일부는 전의를 잃고 자진투항했으나 일부는 저항 또는 도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되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30분 도심지역 소탕작전을 마친 3대대는 공설운동장 옆 도원공원에 집결했고, 한편 1대대는 주택가가 적고 대부분 공장지대로 돼 있어 소탕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3대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소탕작전이 일단 종료됐다.

국군 해병1연대는 이날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야간에는 시내외 요소요소에 대한 경비와 순찰을 강화했다. 소탕작전 첫날 국군 제1해병연대의 전과는 포로만도 181명에 달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인천상륙작전이 기습적인 일격을 가해 전세는 급전됐다. 국군과 유엔군에 쫓긴 북한군은 완전히 지리멸렬됐다. 실제 낙동강 전선으로부터의 추격과 인천-서울지역에서의 포위를 벗어나 북으로 도주할 수 있었던 북한군은 2만5000명 내지 3만여 명이 넘지 못한 것으로 추산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전반적 성과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적에게 결정적인 위협이 된 인천상륙작전은 직접적으로 낙동강 전선의 적군을 급속히 와해시켰다.
둘째,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의 전 병참선이 차단돼 적의 참패가 초래됐다.
셋째, 성공적으로 완수된 작전에 의해서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이 북진작전을 위해 이용 가능하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룬 최대의 성과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단순히 총반격해 38선으로 올라갔을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불과 10일 만의 전투로 서울탈환에 성공해 전체 전투 일수를 3분의 1로 단축시켰으며, 아군 병력 14만 명과 국민 200여 만 명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최권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김윤근 장군이 말하는 인천상륙작전-소탕 작전 눈부신 전과 ‘해병대 신화’ 잇단 호평

김윤근 장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국군 해병대는 1개 연대(3개 대대) 규모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대대장급 이상 해병대 주요지휘관 중 유일한 생존자가 김윤근(해사1기ㆍ해병대 중장 전역ㆍ사진) 당시 3대대장이다. 정호영 기자가 2009년 김윤근 장군으로부터 직접 청취한 인천상륙작전 관련 증언을 소개한다.

해병대 3대대는 1950년 7월 말 편성을 시작, 8월 초 남제주에서 신병훈련을 시작했다. 9월 초 해군 수송함 편으로 진해로 이동해 잠시 기지방어임무를 맡다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신현준 해병대 연대장과 세 명의 대대장이 남포동 어느 건물에 있던 미 해병1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미 해병사단 측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병력과 병기 상태를 상세히 물어봤다.

다음날 부산 제1부두에 미군 트럭 30여 대가 도착, 우리 해병대 연대에 보급할 M1 소총, 카빈 소총, 브라우닝 자동소총(BAR), 박격포, 피복, 장구 등을 내려 놓고 돌아갔다. 다음날 동래사격장에서 새로 받은 총포로 실탄 사격을 연습한 후 부산항 제1부두에 접안한 미 수송함에 승함했다.

그때까지도 우리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배에 탄 후 처음으로 인천상륙작전 계획 내용을 브리핑받았다. 우리 3대대는 미 해병5연대에 배속돼 상륙한다는 사실도 통보받았다.

때마침 태풍이 북상 중이어서 인천으로 가는 항해는 험난했다. 그러나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병기의 조작법을 교육해야 했다. 9월15일 새벽 5시 상갑판에 올라가 보니 미 해군의 군함과 화물선이 인천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상륙작전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새삼 그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새벽 6시 미 해병대 5연대 3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해서 격렬한 전투 끝에 월미도를 확보했다.

한국 해병 3대대를 포함한 미 해병대 5연대 본대는 15일 오후 만조시간에야 상륙할 수 있었다. 상륙부대를 내려놓고 해안을 떠나려는 상륙주정(LCVP)과 상륙부대를 상륙시킬 자리를 찾는 LCVP가 뒤엉켜서 상륙 해안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자리를 찾지 못한 LCVP는 아무 곳에나 병력을 내려놓았다. 우리 대대도 막상 해안에 올라보니 중대가 뒤섞여 있어, 상륙한 해병들은 자기 중대를 찾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월미도와 달리 본대 상륙 때는 적의 저항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상륙 후 해병대 1ㆍ2대대는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했고, 우리 3대대는 김포반도를 방어하면서 서울 수복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3대대는 9월16일 인천 시가지 일대에서 잔적을 소탕한 후, 17일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향했다.
17일은 계양산에서 숙영한 뒤 북진을 계속했다. 21일에는 북한군과 교전해 적 300명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25일과 26일에는 강화도를 건너가는 월곶나루에 도달했다. 북한군은 다급한 나머지 소련제 트럭 3대와 105㎜ 야포 1문을 버려두고 가버리기도 했다.

3대대는 비록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초전에 300명의 포로를 잡아 미 해병으로부터 ‘믿을 만한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3대대는 서울 수복작전에서 공을 세운 해병대 1ㆍ2대대, 개전 초반 통영상륙작전에 성공한 5대대와 함께 이후 주요 전선에서 맹활약하며 해병대의 신화를 만들어 가게 됐다. 
 

 | 제공=국방일보 | 등록일 : 201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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