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세대가 6.25 영원히 기억해줬으면"
(인천=연합뉴스) 최정인 기자 = "나라에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뒤 20년이 넘도록 군 복무를 한 부태삼(78)씨는 60년이 흐른 지금도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씨는 입대 후 숱한 전투에 참가했지만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참가 경력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전후세대에게는 "국가가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인천상륙작전 참가 = 부씨는 부산공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950년 8월30일 해병대 4기로 입대했다. 부모님이 계신 제주도에서 머물던 중 '전쟁 중인 조국에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에 같은 마을 친구들과 함께 주저 없이 나선 것이다. 제주에서 입대식을 갖고 며칠 뒤 부산에 도착한 그는 9월12일 부산항 1부두에서 대형 함정에 몸을 실었다.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소식은 군함 안에서 처음 들었다. 인천상륙작전 3일 전이었다. 9월15일 새벽, 인천 덕적도 앞바다에는 부씨가 탄 함정을 비롯해 세계 8개국 261척의 함정이 집결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청색해안(인천시 남구 용현동 해안도로 입구), 녹색해안(중구 월미도 선착장), 적색해안(동구 만석동 대한제분 입구)에서 각각 이뤄졌다. 부씨는 적색해안 작전에 참여했다. 상륙작전은 1일 2차례 찾아오는 만조 때에만 가능했다. 부씨는 오후 5시께 분대원 12명과 함께 군함에서 내린 상륙주정(LCVP)에 나눠 타고 인천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파제에 도착했다. 미 해병대는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지만 한국 해병대에는 사다리가 없었다. 3~4m 높이의 방파제를 손으로 더듬어 올라가느라 부 회장의 손끝에는 피가 흘렀다. 오후 6시 무렵인데도 인천항 일대에는 연기가 자욱하고 사방 분간이 어려웠다. 부씨는 인천상륙작전 수행 전에 미 해병대 전투기가 월미도 일대를 초토화시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부씨와 분대원들은 M-1 소총을 마구 쏘며 진격해 나아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현재 인천시 중구 응봉산 자락이었다. 응봉산 정상에서 가까운 중국인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운 자리 주변에 흰색 저고리와 바지 차림의 의용군이 5~6명씩 몸이 묶인 채로 숨져 있었다. 부씨는 "전쟁의 한가운데 있음을 실감했다"라고 말했다. ◇연희고지 전투서 첫 부상 =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상륙 다음날인 9월16일부터 미 제1해병사단은 서울로 진격을 개시했다. 부씨가 속한 해병대는 인천에 남아 시가지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인천과 경기도 일대를 누비며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화작전 수행, 104고지 탈취 등의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22일 오후 연희고지 전투에 참가했을 때다.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분대원들과 함께 논두렁 위에서 포복을 하며 이동하는데 머리 위로 '휘익'하는 소리가 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분대원 전체가 나동그라졌다. 인민군이 쏜 박격포탄 2발이 떨어진 것이다. 부씨는 왼쪽 머리 부위에 파편을 맞았다. 부씨가 속한 분대원 13명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부상한 분대원들은 1명씩 들 것에 실린 채 미군 헬기에 의해 구조됐다. 마지막으로 부씨가 구조되지 못한 채 남았고 날이 저물었다. 주위에서 "내일 구조용 헬기가 온다"라는 말이 들렸지만 헬기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소독도, 마취도 하지 못한 채 부씨는 전쟁터에 머물러야 했다. 그로부터 6일 뒤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후세대에 안보의식 심어주고 싶어" = 부씨는 6.25 참전 이후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다가 지난 1973년 2월 28일 부사관 만기 제대를 했다. 인천에 연고가 없었지만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자녀를 낳고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부씨는 인천상륙작전 참전 동지들과 매주 3차례 정도 인천시 연수구의 참전용사회 사무실에서 만난다. 인천지역 초등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상대로 안보교육도 한다. 요즘은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관련 행사에 참석하느라 바쁘지만 행사장에서 만난 전후세대는 조국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했다. 여든이 다된 나이지만, 조국의 소중함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든지 달려가려고 한다. 부씨는 14일 "전세계가 놀랄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했고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선전하는 스포츠강국으로 부상했지만 이 모든 것은 안보를 바탕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라며 "나이 든 노인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안보의 소중함을 다 같이 인식하고 반드시 행동을 통해 잘 지켰으면 좋겠다"라고 당부했다. 연힙뉴스 in@yna.co.kr (끝) |
2010.06.14 19:41
<나의 6.25> '영원한 참전용사' 부태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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