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7 19:55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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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 목탑 터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 있다. 643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
(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됐다. 645년 처음 건축을 시작해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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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구층탑지 심초석 안에서 출토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는 목탑 공사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감독을 맡았다고 기록돼 있다.

 632년 선덕여왕은 45세가 넘는 나이에 신라왕으로 즉위했다. 당시로서는 할머니였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당시에는 빛을 잃었다.

 외로웠다. 사사로운 정을 주고 받을 직계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왕위에 오른 이후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상에서 모든 것을 홀로 결정해야 할 때 언제나 고독이 그녀를 엄습했다. 왕좌는 그녀에게 저주받은 자리였다. 그녀는 국운을 걸고 한쪽이 절멸할 때까지 싸워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상속받았다.

 냉철한 신라의 군주 진평왕이 죽고 늙은 딸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제 무왕은 뭔가 심리적으로 상승돼 있었다. 여왕의 즉위를 축하라도 하듯 그해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하지만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무왕은 이듬해인 633년 8월에 신라 서곡성(西谷城)을 공격했다. 그곳은 무주의 나제통문을 넘어 현재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이었다. 무왕은 적지 않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다.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늙은 여왕에게 질 수 없었다. 13일간 이 요새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

 그곳은 백제의 영토인 전북 무주에서 신라왕경 경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코스의 첫 단추였다. 성의 함락은 여왕에게 심적 압박감을 줬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경제력을 불사에 탕진했다.

 그녀는 즉위 후 분황사와 영묘사 건립에 들어갔고, 634년 정월에 분황사가 완성됐다. 거대한 목재 건물이 지어졌고 정교한 석재 기단 위에 구운 벽돌을 쌓아 모전석탑(模?石塔)을 만들었다. 이듬해 영묘사가 낙성됐다. 이곳의 장육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천왕상(天王像),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 등은 당대의 최고 예술가 양지(良志)의 작품이다.

 그녀는 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 오고 있었고, 영혼은 이미 부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늘 아팠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낮지도 않았다.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병이 들었다. 어떠한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10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4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부처의 영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됐다.

 다행이도 그녀의 곁에는 현실적이고 실천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알천(閼川)은 진중하고 믿음직한 사나이였다. 고귀한 혈통을 가진 진골 귀족이었지만 결코 육체적으로 나약하지도 않았다.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 잡는 완력을 가진 장사이기도 했다.

 여왕의 나이가 50이 훌쩍 넘은 636년이었다. 백제 무왕은 장군 우소(于召)에게 무주의 나제통문을 넘어 독산성(경북 성주)을 급습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독산성은 해발 고도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이었다.

 현재 동서남북의 보루 7개,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 때 쇠창·쇠도끼·삼지창·갑옷·말안장 등이 출토됐다. 영남지방의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물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어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규군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공격해서 함락시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물자와 병력이 소모된다. 무왕은 장군 우소에게 밀명해 특공대 500명을 이끌고 급습해 성을 일단 접수하고, 인근 나제통문 부근에 후속병력을 투입해 점령할 계산을 했다. 636년 5월 출동한 우소는 독산성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합천에서 가까운 성주 쪽 가야산의 옥문곡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급습을 할 작정이었다.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하지만 신라 장군 알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쉬고 있는 백제군 특공대에 알천이 선제 급습을 가했다. 숫자가 우세한 신라군은 금방 백제군을 포위했고 살육에 들어갔다. 신발과 갑옷을 벗고 무기를 세워놓은 상태에서 자다가 급습을 받은 병사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죽고 우소는 시야가 트인 큰 바위에 올라가 활을 쐈다. 우소의 마지막 저항도 화살이 떨어지면서 끝이 났고 사로잡혀 포로가 됐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무왕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가뭄이 찾아든 그해 8월 백제의 도성 남쪽 연못의 망해루에서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자신을 대신해 고구려가 신라를 엄습해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637년 7월 공을 세운 신라 장군 알천은 진급해 신라 군부의 최고 수장인 대장군(大將軍)이 됐다. 이듬해인 638년 북쪽 칠중성에서 고구려군의 침공 소식이 전해졌다. 그곳은 현재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이다.

 칠중성이 자리 잡고 있는 중성산은 해발 고도 149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전면에 임진강이 흐르고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곳은 서해안에서 강화도와 김포반도 북쪽을 거쳐 임진강 하구로 들어온 배가 만나는 여울목이다.

 배는 그곳에서 항해를 멈춰야 한다. 사람들이 강의 여울목 위를 걸어서 도하할 수 있는 수심이다. 고구려 군대는 신라를 침공하는 데 항상 그곳을 이용했다. 수로와 육로가 만나는 요충지였다. 적군이 언제나 도하하는 바로 그 앞에 칠중성이 있다.

 11월 군대를 이끌고 칠중성에 도착한 알천은 수세적인 농성전을 벌이지 않았다. 성 내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그는 휘하의 군대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성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임진강을 등지고 있었고, 알천의 신라군은 남쪽으로 성벽을 등지고 있었다. 피가 튀기는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고 병사들이 죽어 갔다.

 하지만 배후 칠중성에 여유 식량과 예비 병력이 있는 신라군이 유리했다. 신라군은 싸우다 지치면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채운 병력으로 교체됐다. 칠중성 앞에 버티고 있는 신라군을 성으로 몰아넣고, 임진강 도하의 안전한 교두보를 확보해야 고구려군은 임진강 너머에 있는 마초와 식량과 공성기계를 원활하게 가져올 수 있다.

 성 밖에서 싸움이 길어질수록 고구려군은 불리해졌다. 고구려군은 속전속결의 일전을 택해야 했다. 하지만 의도를 간파한 알천은 고구려 군대를 침착하게 대응했다. 고구려군은 지쳐 갔고 강 이북으로 병력을 서서히 빼기 시작했다.

 고구려군 반수가 임진강을 건넜을 때 알천은 전군에 전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동료의 반이 이미 건너간 상황에서 고구려군은 신라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고 강을 향해 달렸다. 대열이 무너진 상황에서 많은 고구려군들이 학살당했다. ‘삼국사기’는 전투의 결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현재 우리가 경주에 가면 여왕이 남겨 놓은 분황사의 탑과 첨성대를 보고 로망에 젖는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도 수많은 신라인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641년 백제의 공격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했다. 신라가 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에 비용을 쏟아부었다. 각 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은 그 전란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대신 ‘공상적인 기대’로 주관적인 세계를 머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냈다.

 <국방일보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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