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진정 잠수함 강국인가? (2) / 국방일보 2012.12.10
美 막대한 물량공세에 獨 패배 끌려가던 U보트 스스로 침몰
독일의 잠수함들이 영국의 순양함 공격에 사용한 직주어뢰. |
문근식 해군대령 |
▶독일 잠수함 U-9, 한 시간 동안에 영국 순양함 3척을 격침하다
U-21 잠수함이 최초로 어뢰공격으로 영국 순양함을 격침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1914년 바로 그해 9월 22일, 오토 베디겐(Otto Weddigen) 대위가 지휘하는 U-9 잠수함이 1시간 동안에 영국 순양함 3척(Aboukir, Hougue, Cressy)을 침몰시키고 승조원 2200명 중 1459명을 수장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잠수함에 대한 공포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침한 이후 거의 30여 년 동안 전 세계의 해양을 지배해온 영국함대에 최고 치욕으로 기록됐다. 당시 영국 해군 참모총장이던 피셔 제독(提督)은 “넬슨 제독이 그의 전 생애 동안 수행한 전투에서 희생시킨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를 잃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오토 베디겐 대위는 또 한번 영국 순양함(Hawk)을 격침함으로써 최초로 ‘잠수함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함장들의 전투 경쟁도 시작됐다.
▶독일 U-보트 드디어 바다의 종결자로 군림하기 시작!
●영국으로 향하는 모든 군함, 상선, 민간선박까지 무제한 공격하다
제1차 세계대전 초창기만 해도 독일 잠수함은 영국 국기를 달고 있는 전투함이나 물자수송선만을 공격했다. 그리고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만들어진 전투수행규칙을 준수해 민간선박들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지 않거나, 격침할 일이 있으면 승조원에게 미리 경고해 구명보트에 탑승할 시간을 줬다. 이러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영국의 민간선박들은 중립국 국기를 게양하고 항해하기 시작했다.
헤이그 협의에 의해 만들어진 전투수행규칙은 잠수함에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독일 잠수함이 전투수행규칙을 지키다가 무장한 상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거나, 적의 수상전투함에 쫓겨 다니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연합국 측에서 독일 잠수함을 격침하고자 민간선박으로 위장한 전투함까지 동원하자 1917년 독일해군은 영국으로 접근하는 모든 선박을 무제한 공격한다는 이른바 ‘무제한잠수함 작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무제한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을 항복 직전으로 몰고 가다
●미국의 참전으로 영국은 기사회생
독일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은 엄청난 결과와 파장을 불러왔다. 복잡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전투수행규칙에서 해방된 독일해군의 잠수함들은 1917년 8월 한 달 동안에만 444척, 총 90만 톤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결과에 고무된 독일 해군지휘부는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U-보트 수를 150척 이상으로 늘려 군수물자 수송선박을 지속적으로 격침함(통상파괴전)으로써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독일 잠수함에 의해 해상교통로가 차단된 영국은 대외무역은 물론이고 영연방(英聯邦)에서 오는 증원 병력의 수송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핵심적 요소인 연료의 재고가 8주분 이하로 떨어지면서 영국의 전쟁지도부는 항복 또는 평화협상 돌파구를 찾는 분위기가 흘렀다.
브레이크 고장 난 차(車)가 내리막길을 타듯 패전(敗戰)의 길로 치닫던 영국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희망을 찾게 됐다. 영국은 자국의 강력한 첩보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중에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독일이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를 통해 미국을 견제하고,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독일이 라틴 아메리카 정부를 지원하려고 한다는 주미 독일대사의 서한을 찾아낸 것이다. 이 서한은 미국에 전달됐다. 이 서한의 내용은 사실 주미 독일대사가 미국의 참전을 걱정해서 이를 견제하는 방안에 대해 타당성을 개인적으로 검토한 것에 불과했지만 당시 고립주의를 지키고 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윌슨 대통령의 격분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다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독일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으로 미국 국적의 선박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참전의 명분은 더욱 명확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원인과 배경은 훗날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됐다. 현재 미국의 참전 원인과 배경을 분석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는 독일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문서 공개를 통해 확실하게 그 원인과 배경이 밝혀진 만큼 독일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역사적 평가는 수정돼야 할 것이다.
한편 1918년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수의 수송선과 이를 호위하는 호위함대를 전쟁에 투입했다. 이러한 미국의 도움에 힘입어 영국은 아사(餓死)직전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영국 선박 90%가 U-보트에 의해 침몰
●전투에선 이겼어도 전쟁에 진 U-보트들, 적 항구로 끌려가다 스스로 침몰
미국의 참전으로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도 독일의 U-보트들은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2500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1218만 톤의 선박을 격침하는 전과를 달성했다. 당시 격침된 영국 선박의 90%는 독일 잠수함에 의한 것이었다.
잠수함이 이러한 성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미국이 막대한 물량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에 비해 독일해군은 잠수함 척수를 크게 증가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사용될지도 모르는 수상함 건조에 더 많은 지원과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해군의 정책은 역사적 아이러니이자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독일해군, 특히 독일 잠수함들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장해제 및 전쟁 배상금으로 영국의 스카파 플로 항구로 끌려가던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들은 마지막으로 독일 해군기를 올렸다. 이 신호를 시작으로 독일해군의 모든 잠수함은 선체바닥에 있는 충수구(물을 채우는 장치)를 열어 막대한 해수를 함 내부로 끌어들였다. 이것은 스스로 침몰하는 것을 의미한다. 차례로 스스로 침몰하는 독일 잠수함의 행동에 놀란 영국해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이 엄포에 굴복한 독일 잠수함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렇게 독일의 잠수함은 한 척, 한 척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검푸른 바다 밑으로 사라져 갔다. 위대한 잠수함 강국의 역사를 기록한 채 말이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