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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 때 미국에서 교육받은 적이 있는 구리바야시 중장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결코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는 안된다”고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전세의 흐름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중순 미 해병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에 상륙하자 구리바야시는 유황도에서 미군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황도는 8km에 불과한 작은 화산섬으로 유황 때문에 계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샘도 없으며 관목이 듬성듬성 나 있지만 뱀도, 새도 살지 않는 불모지대다.
  
생존을 거부한 버림받은 땅이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두 개의 비행장이 있고 세 번째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 비행장으로 인해 이 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상 요충지로 부상했다. 즉 유황도를 확보하면 서부 태평양의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일본 본토와 전초기지를 폭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섬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구리바야시는 이제 연합함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6월에 있은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군 연합함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일본군 항모 세 척이 미군의 잠수함과 함재기에 의해 침몰했고 군함 네 척은 파손됐으며 비행기는 무려 400대나 파괴돼 연합함대 항공력의 절반이 파괴됐다.

구리바야시가 지휘하는 부대는 육군 보병 제145연대 2700명, 새로 증원된 육군 제109사단의 제2여단 5000명, 그리고 제26전차연대의 전차 23대와 이치마루 소장의 해군 항공대 7347명을 통틀어 2만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 병력으로 타라와·콰잘린과 같이 해안선을 사수할 생각은 없었다.

미 해·공군의 폭격과 해병대 상륙에 대해 해안선의 기관총 진지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구상은 2만1000여 명의 전 부대원이 되도록 오래 견디며 한 사람이 미군 10명을 죽인다는 것이다.
구리바야시는 이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하 동굴진지를 파기로 했다. 그러나 유황도만큼 지하호를 구축하는 데 부적당한 곳도 없다. 10m만 파도 열기가 올라와 5분 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바위를 뚫고 방벽을 쌓는 그 힘든 작업은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 수백 명이 한 것이다.
사격 진지는 지상과 동굴에 800개 가량 구축했다.
구리바야시는 닥쳐올 전투에서 살아남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을 예측하고 솔직히 적었다.

“내 무덤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소.
만일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내 영혼은 당신과 아이들 곁으로 돌아갈 것이오.”
이것이 그가 쓴 마지막 편지였다.
45년 2월19일 새벽 유황도 남동 16km 지점에 미군 군함이 나타났다.
해병 제4·제5사단 병력이 LVT·LCVP에 탑승하고 있는 동안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오전 7시30분, LVT의 제1파가 해안에서 3km 떨어진 발진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8시에 함포사격이 중지되고 200대의 함재기가 네이팜탄과 로켓탄, 그리고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사이판에서 날아온 B-29 편대가 19t의 폭탄을 투하한 다음 함포 사격이 다시 시작돼 30분 동안 8000발을 쏘아댔다.
 

 

1945년 2월19일 오전 8시30분, 제1파 LVT 68척이 나란히 해안으로 향했다. 이와 같이 질서정연하게 전장을 향한 병사 대부분은 이윽고 전사자 명단에 오르게 돼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제1파가 해안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쯤이었다.
해병대가 해안에 당도할 때까지 어떤 사격도 받지 않았지만 막상 상륙하려는 그들 앞에 유황도의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3~4m에 이르는 절벽을 LVT는 궤도가 헛돌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으며 지반이 약해 병사들도 네 발로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태평양 전쟁에서의 경험으로 보아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의 제3파까지 상륙이 끝났을 때 일본군의 일제 공격이 개시됐다. 이렇게 시작된 살육전은 일본군 최후의 1인까지 계속됐다.
상륙해안의 우익에서는 제4해병사단과 병력이 바위동굴 진지와 맞은편 언덕으로부터 치열한 포격을 받고 있었다.
이미 해변에는 해병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후속한 불도저는 시체를 밀어붙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전 10시쯤 바위동굴 진지를 제압하기 위해 16대의 셔먼 전차가 투입됐다.

포탄 속에서 불도저는 진로를 개척했고 전차는 전진했다. 전차를 저지하려다 오히려 역습을 당하게 된 일본군 대위가 가슴에 폭약을 안고 셔먼 전차에 돌진, 자폭하고 말았다.
 

 

오후 4시30분쯤 바위동굴 하나를 점령했으나 해병대 제25연대 제3대대는 대대장이 전사하고 700명의 대대원이 150명만 남고 모두 전사나 부상했으며, 어떤 중대는 240명의 중대원 중 18명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2월22일 마침내 스리바치산이 정복됐다. 이로써 해병대는 유황도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다. 이때 갱내에서 일본군 150명이 기어나와 북쪽으로 도주했으나 북쪽 진지에 도착한 병사는 20명뿐이었다.
 

 

상륙일로부터 6일 후 해병대 3개 사단은 섬 북단의 바위 투성이 동굴진지를 목표로 나란히 전진했다.
미군들이 382고지(382피트)라고 이름 붙인 이 바위 둔덕이야말로 미군들의 피를 요구하는 곳으로 ‘고기분쇄기’와 ‘죽음의 계곡’이 있는 곳이다. 제4해병사단 장병들은 그곳에서 1m당 4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제5해병사단 제27연대는 한 개 동굴 앞을 100m 전진하는 데 1시간 정도 걸렸으며 94명이 전사했다.
 

 

3월2일부터 3일까지 제4해병사단의 E중대가 382고지를 공격하면서 6명의 지휘관을 잃었고 마지막에는 중대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미군의 공격이 가열해지자 일본 해군의 지상부대 지휘관 이노우에 대령은 구리바야시의 명령을 어기고 미군을 공격키로 했다.

그는 3월8일 밤 10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미 해병대 제23연대 제2대대 포위망 쪽으로 은밀히 접근했다.
일본군은 소총과 수류탄을 들었으며 폭약을 가슴에 붙들어 매기도 했고, 심지어 죽창까지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2대대 지휘소 전방 10m까지 포복으로 전진한 후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노우에를 비롯한 돌격대는 미군의 기관총과 수류탄에 대부분 전사했으나 일부는 진내까지 돌입, 밤새도록 백병전을 벌였다.
날이 밝자 전투현장의 참상이 드러났다.
일본군의 시체는 784구였으며 미군도 90명이 전사하고 25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간과 사상자 수가 늘어감에 따라 악마의 굴도 어쩔 수 없이 점차 파괴돼 갔다.

3월13일, 해병대 제26연대 정찰대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동굴까지 육박했다. 다음날 밤 구리바야시는 전령을 통해
정예 145연대의 병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물었다. 현재 6명이라고 회답이 왔다. 그는 다시 전령을 보내 군기를 적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3월17일, 니미츠 제독이 괌에서 유황도 탈취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까지 유황도에서의 미군 사상자 수는
전사자 4189명, 부상자 1만9938명으로 미 해병대 168년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부상자 중 후에 사망자가 있어 실제 사망자 6821명, 부상자 2만1865명이었다.

구리바야시는 3월26일까지 살아 있었고 이날 감행된 최후의 결사대에 가담했다고 한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군 262명과 미군 53명이 또 전사했다. 구리바야시는 중상을 입고 나중에 자결했다.
자료출처 : 싸이월드 - 이용빈
 
 

  1. 유황도의 참상 - 이용빈

    대위 때 미국에서 교육받은 적이 있는 구리바야시 중장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결코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는 안된다”고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전세의 흐름...
    Date2010.05.23 By운영자 Views6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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