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부대를 최초로 활용한 나라는 러시아일 것이다. 1931년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 최초의 공수부대(PDO : parashyutnodesantniyotryad )가 공수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첫 실전은 적군(Red Army)이 타지크(Tadzhik)에서 포위된 우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15명의 부대원을 공수한 것이 최초로 그 때가 1929년이였다.
1930년에는 모스크바 군관구의 보르네즈에서 실험적 훈련이 수행되었는데 이 훈련의 책임자들은 M. N. Tukhachevsky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A. N. Lapchinsky (적군 공군의 책임자), N. P. Ivanov 였다. 실험 훈련 결과, 항공기(이 시절에는 민간용 항공기)를 이용하여 아군을 적군의 배후에 침투시켜 적군을 혼란시키고 이군의 작전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다는 이론이 만들어졌다. 소련에서는 1933년까지 5만명으로 구성된 공정 부대가 만들어진다.
1934년 벨루루시 군관구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공수 훈련이 실시되었고, 1935년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교외에서 행해진 군사훈련에 많은 외국 군사 사절이 초청되어 2,500명이 참가한 공수 훈련 시범을 참관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유럽과 미국에서 공정부대의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1935년에 공정부대를 편성했고, 1937년에는 프랑스에서, 그리고 영국에서도 부대 편성을 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교관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였다.
공군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212 공정여단은 극동지역에 배치되어 1939년 7월과 8월에 일본군과 칼킨골 전투에 지상부대와 같이 지상전에 참가하고, 같은 해 9월에는 201, 204, 214 공정여단이 폴란드 점령에 동원된다. 최초의 대규모 실전 부대의 공수 낙하는 1939년 핀란드전으로 핀란드의 Petsamo근처에서 이루어졌고, 이어서 루마니아 Bessarabia의 점령에 공정부대의 낙하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실전 경험을 통해 5개의 공정여단이 군단급으로 확장되어 유럽쪽에, 1개의 공정 여단은 극동지역에 배치되었다.
1941년 갑작스러운 독일군의 소련침공으로 많은 공정부대 지원용 장비, 즉 항공기들이 파괴되어 공정작전을 제대로 펼칠 기회가 없어진 소련의 공정부대는 일반 소총부대로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42년말에서 1943년초 겨울 기간동안 201공정 여단이 Medzyn 근교와 Vyazma에서 비로서 공정 작전을 실행 했고, 2월 14일부터 2월 22일까지 Rzhev 지역에서는 204공정 여단이 공정 작전을 실행했다. 같은 해 2월, Vyazma 부근의 독일군 전선 후방에 제4공정군단 전체를 공수 낙하시키는 야심찬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작전을 수행할 항공기의 부족(22대의 TB-3, 40대의 PS-84가 1주에 2-3번의 소티만 가능)으로 겨우 부대 전체의 1/4만이 공수되었고, 또한 나빠진 기상 조건으로 작전은 수렁에 빠져버렸다. 몇 달 후의 Yukhnov에서의 공정작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작전의 실패는 소련 최고 지휘부로 하여금 공정부대를 일반 소총부대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주로 코커서스지역과 스탈린그라드지역의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공군은 또다시 근위공정사단을 창설하게 되고 1943년 9월, 제1, 3, 5공정 여단으로부터 10,000명의 공정부대원을 동원하여 드네프르 강 교두보 확보 작전을 위해 공정작전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 작전도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실패로 끝난다. 단지 유일한 성공은 크림지역에서의 소규모의 특수 해병 공수부대원들이 참가한 작전과 1945년 만주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소규모의 작전 뿐이였다.
[자료출처] 야후 바람의소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