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200862_0.jpg해병1사단의 ‘쇼리(shorty· 부대에서 잔심부름 등을 하던 소년)’였던 친구를 통해 데이비드 비티(David Beattie)라는 미군병사를 알게 된 것은 1952년 5월이었다. 나는 ‘비티’를 ‘빌리’로 알아듣고 오랫동안 그렇게 불렀다. 당시 21살이었던 비티는 욕을 하거나 큰소리를 치는 법이 없었고, 틈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그는 내게 음식을 따로 챙겨줬고, 자신의 침대 곁에 내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적진에서 날아온 포탄이 휘발유 드럼통에 떨어져 큰 불이 났다. 냇가에서 멱을 감고 벙커로 돌아오던 나는 불덩어리가 된 ‘휘발유 벼락’을 맞았다. 빌리가 점퍼로 내 몸을 감싸고 미군 야전 병원으로 옮겼다. 18시간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휴전 후 속초의 미군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빌리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 소년을 통해 빌리가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서울의 모자공장에서 마룻바닥을 쓸고 닦는 일을 했다. 공장장의 눈에 들어 판매원에 발탁되고, 18살 때는 공장 하나와 판매 점포를 관리하는 자리에 올랐다. 19살 때는 모자 공장을 차리는 모험을 했다. 1959년 모자 70개에 불과한 노점으로 출발한 영안모자는 전세계에서 1억개 이상의 모자를 판매하는 회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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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한 소년 백성학(오른쪽 두번째).
 
나는 모자로 성공하는 동안에도 한 순간도 빌리를 잊은 적이 없다. 1970년 처음 미국에 갔을 때도 지나치는 사람 중에 혹시 빌리가 없을까 40대 중반의 남자만 보면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1985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데이비드 리드 기자를 만나 빌리를 찾기 위한 인터뷰를 했다. 나는 빌리의 성(姓)도 몰랐고, 빌리와 동료들의 군복에 ‘발길질하는 야생마에 올라탄 카우보이’가 그려진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미 국방성과 주한미군 기록을 뒤져 빌리의 부대가 와이오밍주 방위군의 일부로, 제300기갑 야전포병 대대였음을 밝혀냈다. 잡지가 나가자 미국 전역에서 300여통의 편지가 밀려들었다. 자신이 빌리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결정적인 제보는 없었다.

빌리를 찾지 못해 내게 미안해하던 리드 기자는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33년간 첩보요원으로 일하고 은퇴한 코틀랜드 존스 씨를 소개했다. 70세의 존스 씨는 “빌리를 찾는 일이야말로 내가 한 것 중에 가장 뜻깊은 일”이라며 보수 없이 봉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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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6·25 당시 300포병대대 A중대 상사로 복무했던 데이비스 상사가 잡지를 읽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는 “빌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한국인 쇼리 4명의 사진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진에는 화상으로 온 몸에 붕대를 감은 40년 전 내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존스 씨는 즉시 미 육군본부로 달려가 6·25참전 300포병대대 명단에서 ‘빌리’라는 이름 12명을 찾아냈다. 하나하나 주소를 추적했지만 모두 내가 찾는 빌리는 아니었다. 존스 씨는 A중대원들도 만났지만 누구도 빌리를 알지 못했다.

1988년 데이비스 상사가 “A중대 모임을 갖고, 각자 갖고 있는 참전사진을 다 가져오면 그 가운데 빌리 사진이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듬해 5월 A중대 전우 14명이 미국 캔자스시티에 모였다. 나는 이들이 가져온 사진 1000여장을 2박3일에 걸쳐 하나하나 살폈다. 오랜 세월에 기억이 희미해져 빌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3일째 한 사진을 들었을 때 사진 속 한 병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두 번씩이나 지나쳤던 사진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빌리의 얼굴이었다. 전우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들은 “이 친구는 빌리가 아니라 데이비드 비티”라고 했다. 얼마 뒤 리드 기자로부터 ‘비티’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비티는 내가 그토록 찾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 정도의 친절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연락을 받은 지 5시간만에 비티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16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그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떨렸다. 비티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나는 비티에게 받은 은혜를 떠올리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내 도움을 받지 않았다. 비티는 “학,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 자네의 뜻과 사랑은 충분히 받아들이겠네. 정말 고맙고 반갑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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